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고구려본기(高麗夲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高麗) 말기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다투어 신봉하였다.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이 소문을 듣고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와서 ≪도덕경(道德經)≫을 강의하니 왕이 나라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 곧 제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무덕(武德) 7년 갑신(甲申, 624)의 일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佛老)를 배우고자 청하니 당(唐)나라 황제(皇帝) 고조(高祖)가 이를 허락하였다.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여 정관 16년 임인(壬寅, 642) 역시 3교(三敎)를 함께 흥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때 신임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권고하기를 유교와 불교(儒釋)는 함께 성하나 도교(黃冠)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教)를 구하자고 하였다.
그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은 반룡사(盤龍寺)에 있으면서 좌도(左道)가 정도(正)에 맞서면 국운이 위태로울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통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의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곧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 6월이었다. 또 본전(本傳)에서는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 3월 3일이라고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경술년(庚戌年)과는 19년의 간격이 있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국사(國史)≫이다.
진락공(真樂公)이 남긴 시가 당(堂)에 남아 있고, 문열공(文烈公)은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
또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보다 먼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裨將)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하여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반드시 총신(寵臣)이 되어서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다. 개(盖)씨가 조정을 전횡하게 되자 개(盖)를 성(性)으로 하였으니, 곧 양명(羊皿)이 이에 부합된다.
또 고구려고기(高麗古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10년 갑술(甲戌, 614) 10월에 고구려왕(高䴡王)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이때는 제36대 영양왕(嬰陽王) 즉위 25년이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小弩)을 가슴 속에 감추고 표문(表文)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煬帝)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煬帝)가 표문(表文)을 들고 읽을 때 활(弩)을 쏘아 양제(煬帝)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煬帝)가 군사를 돌이켜 세우려 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朕)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萬代)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 고구려(髙䴡)의 대신(大臣)이 되어서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帝王)의 원수를 갚겠습니다”고 하였다.
황제(煬帝)가 죽은 후 고구려(髙䴡)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聦明)하고 신무(神武)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국사(國史)≫에는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양(武陽)이라고 하니 잘 알 수 없다. 스스로 성(姓)을 개(盖)라고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의 직이다. ≪당서(唐書)≫에는 “개소문(蓋蘇文)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序文)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蘇文)이 곧 직명(職名)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傳)에 이르기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의 서문(序文)”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개금(蓋金)이 아뢰기를, “솥(鼎)에는 세 발(三足)이 있고, 나라(國)에는 3교(三敎)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보니 나라 안에 다만 유교(儒)와 불교(釋)가 있을 뿐 도교(道教)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당(唐)나라에 요청하였더니 태종(太宗)이 서달(敍達) 등 도사(道士) 여덟 명을 보냈다. ≪국사(國史)≫에는 “무덕(武德) 8년 을유(乙酉, 625)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 불교(佛)와 도교(老)를 청하니 당(唐)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의하면, 양명(羊皿)이 갑술년(甲戌年, 614)에 죽어서 이곳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겨우 10여 세일 것인데, 재상(寵宰)으로서 왕에게 권고하여 사신을 보내 청했다고 하였으니, 그 연월(年月)에 반드시 한 군데는 틀린 것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 두 기록을 다 남겨둔다.
왕이 기뻐하여 절(佛寺)을 도관(道館)으로 삼고, 도사(道士)를 높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하였다. 도사(道士)들은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는 신월성(新月城)이었는데, 도사(道士)들은 주문(呪文)으로 남하(南河)의 용(龍)에게 명하여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고 하고, 참서(讖)를 지어 용언도(龍堰堵)라고 하고,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영석(靈石)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속설에 도제암(都帝嵓)이라고 하고,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개금(盖金)이 또 아뢰어 동북 서남에 장성(長城)을 쌓게 했는데,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다. 공사는 16년만에야 끝났다.
보장왕(寶藏王)시대에 이르러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와서 치다가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침공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사로잡아 당(唐)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寶藏王)의 서자(庶子)는 4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항복하였다. ≪국사(國史)≫와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 1092)에 우세승통(祐世僧統)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 비래방장(飛來方丈)에 이르러 보덕 성사(普德聖師)의 진영을 뵙고 시를 남겼는데,
“열반방등(涅槃方等)의 교는 우리 스님으로부터 전수하였다”고 운운하다가
“애석하구나, 방장(房)을 날려온 후에는 동명왕(東明)의 옛나라 위태로와졌네” 발문(跋)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髙䴡)의 보장왕(寶藏王)이 도교(道敎)에 혹하여 불법(佛法)을 믿지 않으므로 스님은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까지 왔다.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髙䴡)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汝國)가 망할 날(敗亾)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고(告)하였다.
모두 ≪국사(國史)≫와 같고 나머지는 본전(夲傳)과 ≪승전(僧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스님에게는 11명의 고명한 제자가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尚)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珍丘寺)를 세웠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으며,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으며, 개원화상(開原和尚)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하여 말한다.
불교는 넓고 넓어 끝없는 바다(釋氏汪洋海不窮)
백 갈래 하천 같은 유교와 도교 이를 조종 삼는다(百川儒老盡朝宗)
가소롭다. 고구려왕은 웅덩이만을 봉하고(䴡王可笑封沮洳)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탑상(塔像)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0) | 2019.06.27 |
---|---|
흥법(興法) 동경(東京) 흥륜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0) | 2019.06.25 |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 (0) | 2019.06.23 |
흥법(興法)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猒髑滅身) (0) | 2019.06.22 |
흥법(興法) 아도기라(阿道基羅) (0) | 2019.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