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성(遼東城)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구려(髙䴡) 요동성(遼東城) 옆의 탑(塔)은 옛 노인(古老)들이 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고구려(髙䴡)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여 행차했을 때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五色雲)이 땅을 덮은 것을 보고 구름 안을 와서 찾아보니 어떤 승려(僧)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다가가면 곧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옆에 세 겹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가 솥(釜)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으나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승려(僧)를 찾으니 오직 잡초만 있었고 땅을 1장(丈) 정도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을 얻었고 또 파보니 명(銘)을 얻었는데 위에 범서(梵書)가 쓰여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불탑(佛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답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본래 휴도왕(休屠王)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 이로 인하여 신심(信心)이 생겨 7중 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후에 불교가 비로소 들어와 그 시작과 끝을 다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였는데 본래의 탑(夲塔)은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염부제주(閻浮提洲)를 통일하고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좌(遼左)에 전쟁이 있어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隋)나라가 친 요동(遼東)의 옛 땅에 이르러서 산의 불상을 보았는데 텅 비어서 쓸쓸하고 사람의 왕래가 끊겨 있었다. 옛 노인에게 물으니 ‘이것은 선대에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였고 곧 그림으로 베껴 경사로 돌아왔다. ≪약함(若函)≫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요동성(遼東城)은 압록(鴨緑)강 밖에 있고 한(漢)의 유주(幽州)라고 하는데 아닌 듯하다. 동명(東明)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기원전 19)에 승하하였다. 이때 한(漢) 또한 아직 패엽(貝葉, 불경)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梵書)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佛)를 칭하여 포도왕(蒲圖王)이라 한 것은 아마 서한(西漢) 시대 때 서역문자(西域文字)를 혹시 알고 있는 자가 있어서 고로 범서(梵書)라고 한 듯하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阿育王)은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의 사람이 사는 땅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천개를 세워 큰 돌 속에 숨겼다고 한다. 지금 곳곳에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가 아닌데 대개 진신 사리(真身舎利)는 감응(感應)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찬(讚)하여 말한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育王寳塔遍塵寰)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다(雨濕雲埋蘚纈班)
생각컨대 그때의 길손의 눈은(想像當年行路眼)
몇 사람이 제신의 무덤을 가리켰을까(㡬人指㸃祭神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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