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 오만진신(䑓山五萬真身)
산중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 성자(真聖)의 거주처라고 이름 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법사(法師)가 중국(中國) 오대산(五䑓山)의 문수보살(文殊)의 진신(真身)을 보고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당(唐)나라에 들어갔다. ≪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夲史)에 따른다.
처음에 중국(中國) 태화지(太和池) 가의 문수보살(文殊)의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였더니, 홀연히 꿈에 대성(大聖)이 4구의 게(四句偈)를 주었다. 꿈을 깨고 보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이므로 해독하지 못하여 망연하였다.
다음날 아침 갑자기 한 스님(僧)이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緋羅金㸃袈娑) 한 벌과 부처의 바리(佛鉢)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佛頭骨)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에 이르러서 묻기를, “어찌하여 그리 근심하시오?”라고 하였다. 법사(法師)가 대답하기를 “꿈에 사구의 게(四句偈)를 받았는데 그 게가 모두 범어(梵語)이므로 해석할 수 없는 글들이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스님(僧)이 번역하여서 일러주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囊)은 일체법(一切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㘑哆佉嘢)는 자성(自性)이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랑(曩伽呬伽曩)은 법성(法性)을 이와 같이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라(達㘑盧舍那) 함은 즉 노사나불(盧舍那)를 본다는 말이외다.”라고 하고는 이어 그 스님이 가졌던 가사(袈裟) 등 물건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본사(夲師) 석가세존(釋迦尊)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그대의 본국(夲國) 동북방(艮方)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䑓山)이 있고, 1만 문수보살(文殊)이 항상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영험 있는 유적(遺跡)을 두루 찾아보고, 장차 고국(本國)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태화 연못가(太和池)의 용(龍)이 나타나(現身)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고하기를, “옛날 게(偈)를 전수한 노승(老僧)이 바로 참 문수보살(真文殊)입니다.”고 하였다. 또 절을 창건하고 탑을 세울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는데,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法師)는 정관 17년(643)에 이 산에 이르러 진신(真身)을 보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가서 살다가 문수보살(文殊)을 뵈니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淨嵓寺)가 이것이다.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곧 범일(梵日)의 문인(門人)이었던 사람인데 와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서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信義)가 죽은 뒤 암자 또한 오래도록 폐하였더니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신라(新羅)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하서부(河西府)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국사(國史)≫를 살피건대, 신라(新羅)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 3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이르기를,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곧 신룡(神龍)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은 융기(隆基)로 신문왕(神文)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은 이름이 이공(理恭) 또는 이홍(理洪)으로, 역시 신문왕(神文)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의 이름은 정명(政明) 자는 일조(日照)이다. 정신(淨神)은 아마도 정명(政明)·신문(神文)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孝明)은 곧 효조(孝照) 또는 효소(孝昭)로 쓴 데서 온 와전인 듯하다. 기록에 이르기를, 효명(孝明)이 즉위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말한 것도 역시 분명치 못한 말이니,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성덕왕(聖德王)이다.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곳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더니, 문득 하루 저녁은 형제 두 사람이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五䑓山)에 들어가 숨었다.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 무신(戊申) 8월초에 왕이 산중에 숨었다.”고 하였으나, 아마 이 글은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대, 효조(孝照) 또는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열 여섯 살이었다.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그때 나이 스물 여섯 살이었다.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하니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만약 태화(太和) 원년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임진(壬辰)보다 이미 45년이나 앞섰으니,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치세이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던 자들이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에 나라로 돌아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니 푸른 연꽃이 문득 땅 위에 피었다. 형 태자(太子)가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게 되면서 이를 보천암(寶川庵)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을 향하여 6백여 보를 가니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에 또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면서 각기 부지런히 정업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우러러 배례하려고 하니,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 1만 관음보살(觀音)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수위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수위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또는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을 수위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의 진신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오만(五萬) 진신(真身)에게 일일이 우러러 예배하였다. 매일 이른 새벽에 문수보살(文殊大聖)이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上院)에 이르러 36가지 모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모양(佛靣形)으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 모양(寳珠形)으로, 혹은 부처의 눈 모양(佛眼形)으로, 혹은 부처의 손 모양(佛手形)으로, 혹은 보탑 모양(寳塔形)으로, 혹은 수 없이 많은 부처의 머리 모양(萬佛頭形)으로, 혹은 만등 모양(萬燈形)으로, 혹은 금다리 모양(金橋形)으로, 혹은 금북 모양(金鼔形)으로, 혹은 금종 모양(金鍾形)으로, 혹은 신통 모양(神通形)으로, 혹은 금다락 모양(金樓形)으로, 혹은 금륜 모양(金輪形)으로, 혹은 금강저 모양(金剛柝形)으로, 혹은 금옹기 모양(金甕形)으로, 혹은 금비녀 모양(金鈿形)으로, 혹은 오색광명 모양(五色光明形)으로, 혹은 오색원광 모양(五色圎光形)으로, 혹은 길상초 모양(吉祥草形)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青蓮花形)으로, 혹은 금전 모양(金田形)으로, 혹은 은전 모양(銀田形)으로, 혹은 부처의 발 모양(佛足形)으로, 혹은 뇌전 모양(雷電形)으로, 혹은 여래가 솟아나는 모양(来湧出形)으로, 혹은 지신이 솟아나는 모양(地神湧出形)으로, 혹은 금봉황 모양(金鳳形)으로, 혹은 금까마귀 모양(金烏形)으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모양(馬産師子形)으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모양(雞産鳳形)으로, 혹은 청룡 모양(青龍形)으로, 혹은 흰코끼리 모양(白象形)으로, 혹은 까치 모양(鵲鳥形)으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모양(牛産師子形)으로, 혹은 노는 멧돼지 모양(逰猪形)으로, 혹은 푸른 뱀 모양(青虵形)으로 나타나 보였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서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그 무렵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나라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장군(將軍) 네 사람을 산에 보내 두 왕자를 맞아오게 하였다.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그때 오색구름(五色雲)이 7일 동안이나 드리워 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쫓아 모두 와서 의장(노부, 鹵簿)을 벌여 열을 짓고, 두 태자(太子)를 맞이하여 가려고 하였다. 보천(寶川)은 울면서 굳이 사양하므로 효명(孝明)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 고기(古記)에 이르되, 재위 20여 년이라 하였음은 아마도 붕어할 때 나이 스물 여섯 살을 잘못 전한 것이리라. 재위는 다만 10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의 아우가 왕위를 다투었다는 일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신룡(神龍) 원년 을사(乙巳) 3월 초 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真如院)을 개창하니, 대왕(大王)이 친히 백료(百寮)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文殊大聖)의 소상(塑泥像)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聖徳王) 즉위 4년이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화엄경(華嚴経)≫을 오랫동안 전독하여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하고, 길이 공양할 비용을 매년 봄과 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백 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하는 것을 항상 규칙으로 삼고, 진여원(真如院) 서쪽으로 6천 보를 걸어서 모니점(牟尼岾)과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는 땔나무 산판(柴地) 15결, 밤나무 숲 6결, 전답 2결을 주어 처음으로 장사(莊舍)를 두었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신령한 골짜기(霊洞)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晩年)에 육신肉身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珎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머물러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를 외우는 것을 낮과 밤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령(窟神)이 몸을 나타내어(現身) 이르기를, “내가 굴의 신령(窟神)이 된지 이미 2천 년이 되었으나, 오늘에야 비로써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받고 난 다음날 굴이 또한 형체가 없어졌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나서 오대산(五䑓山) 신성굴(神聖窟)로 돌아갔다. 다시 50년 동안 도를 닦으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세 번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가 차를 다려 공양하였고, 40명의 성중(聖人)이 10척 상공을 날아 항상 호위하고,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돌아다녔으므로 이것으로써 종과 경쇠(鍾磬)를 삼아 때를 쫓아 수업하였다.
어떤 때는 문수보살(文殊)이 보천(寳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莂)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寳川)이 바야흐로 입적하는 날 후일 산중에서 행할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다음과 같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大脉)로서 각 대(䑓)는 진신(真身)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청색은 동대(東䑓)의 북각(北角) 밑과 북대(北䑓)의 남쪽 기슭(南麓) 끝에 있으니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원상(圓像)의 관음보살(觀音)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觀音像)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福田) 다섯 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経)≫, ≪인왕경(仁王)≫, ≪반야경(般若)≫, ≪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念誦)하게 하여 이름을 원통사(圓通社)로 하여라. 적색인 남대(南䑓) 남면에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지장보살(地藏)과 붉은 바탕에 8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상(地蔵像)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福田) 다섯 명이 낮에는 ≪지장경(地藏経)≫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을 읽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금강사(金剛社)로 하여라.
백색인 서대(西䑓) 남면에 미타방(弥陁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무량수불(無量壽)과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수위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福田) 다섯 명이 낮에는 8권의 ≪법화경(法華)≫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弥陁禮懺)을 염송(念誦)하되, 수정사(水精社)로 하여라. 흑색인 북대(北臺) 남면에 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원상(圓像)의 석가불(釋迦)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釈迦如來)를 수위로 5백 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福田) 다섯 명이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経)≫과 ≪열반경(涅槃経)≫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念誦)하되, 백련사(白蓮社)로 하여라. 황색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 중앙에 진흙으로 빚은(泥像) 문수보살(文殊)의 부동명왕상(不動)을 봉안하고, 뒷벽에는 노란 바탕에 비로자나불(毗盧遮那)을 수위로 한 36가지로 변화하는 모양(三十六化形)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福田) 다섯 명이 낮에는 ≪화엄경(華嚴経)≫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을 읽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念誦)하되, 화엄사(華嚴社)로 하여라. 보천암(寳川庵)을 화장사(華藏社)로 고쳐 세우고, 원상(圓像)의 비로자나(毗盧遮那) 삼존(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고, 복전승(福田) 다섯 명이 ≪대장경(大藏經)≫을 항상 열람하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念誦)하고,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백일 동안 베풀되,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로 하여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삼아 굳게 보호하며 지키고,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면, 국왕(國王)이 천추(千秋)를 누리고 백성은 평안하고 문무(文虎)는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더 배치하여 여러 사(社)들의 도회소(都會)로 삼고 복전승(福田) 일곱 명이 밤낮으로 늘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懴)을 행하고, 위의 37명의 재(齋)에 드는 경비와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 내(道內) 8주(州)의 세금으로 네 가지 일의 자금에 충당하게 하라. 대대로 군왕은 잊지 않고 준행하면 다행이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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