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고 한다. 그 산의 양지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天龍寺)라고도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림(鷄林)의 땅에는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逆水)와 객수(客水)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에 이른다.”
속전(俗傳)에는 이르기를, “역수(逆水)는 고을의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 남쪽으로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고 하였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天龍寺)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국(中國)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안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 이르기를, “옛날 단월(檀越)에게 두 딸이 있어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고 하였는데, 양친이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딸의 이름으로 절이름을 삼았다”고 하였다. 경내가 특이하여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新羅) 말에 파괴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대성(大聖)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崔殷諴)의 아들 최승로(崔承魯)가 최숙(崔肅)을 낳고, 최숙(崔肅)이 시중(侍中) 최제안(崔齊顔)을 낳았는데, 최제안(崔齊顔)이 바로 중수(重修)하여 다시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万日道塲)을 설치하고 조정의 뜻을 받았고, 겸하여 신서(信書)와 원문(願文)을 절에 남겨두었다. 죽어서 절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보여주었다.
그 신서(信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檀越)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同內史) 문하평장사주국(門下平章事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쓴다. 동경(東京)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天龍寺)가 쇠잔하고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제자(弟子)는 특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며 백성과 나라가 편안하고 태평하시기를 발원하여 전당(殿堂)·회랑(廊閣)·방사(房舍)·주고(廚庫)를 와서 모두 이룩하고, 석조불(石造佛)과 니소불(泥塑佛) 몇 구를 조성하여 석가만일도량(釋迦万日道塲)을 개설하였다. 이는 나라를 위해서 이룩한 것이니, 관가(官家)에서 주지(住持)를 정하는 것도 역시 옳겠지만, 바뀌어 교대될 때는 도량(道塲)의 승려들이 안심하기가 어렵다. 희사한 토지로 사원을 충족하게 한 예를 보면, 팔공산(公山) 지장사(地藏寺) 같은 곳은 입전(入田)이 2백 결이고, 비슬산(毗瑟山) 도선사(道仙寺)는 입전(入田)이 20결이며, 서경(西京)의 사방에 있는 산사(四面山寺)도 각기 20결씩이다.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막론하고 반드시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이를 뽑아서 사중(社衆)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차례를 이어 주지(住持)로 삼아 분향수도(焚修)함을 상례로 삼았다.
제자(弟子)는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天龍寺)도 역시 사중에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대덕(大德)을 골라 뽑아 동량(棟梁)으로 삼아 주지(住持)로 임명하여 길이 분향수도(焚修)하게 한다. 문자를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剛司)에게 맡기니, 당시의 주지(住持)로부터 시작해서 유수관(留守官)의 공문(公文)을 받아 도량(道塲)의 여러 대중들에게 보일 것이며, 각자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중회(重熙) 9년 6월 일.”
관직을 갖추어 이상과 같이 서명하였다. 살펴보면, 중희(重熙)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年号)이니, 본조(本朝) 정종(靖宗) 7년 경진(庚辰, 104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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