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


이 절은 서울(京城)의 동남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불 미륵존상화광(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開元) 7년 기미(己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喰)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亡考)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觀肖里夫人)을 위하여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石彌勒) 한 구를 정성껏 조성하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喰), 아우 양성(良誠) 소사(小舍),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와 또한 서형(庶兄) 급한(及漢) 일길찬(一吉喰), 일당(一幢) 살찬(薩喰), 총민(聰敏) 대사(大舍),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함께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亡妣) 초리부인(肖里夫人)은 고인이 되어서, 동해(東海) 흔지(欣支)가에 흩었다. 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그 글의 뜻을 알 수 없지만, 다만 옛날 글 그대로 적어둔다. 아래도 같다.
미타불화광(弥陁佛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아찬(重阿喰)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셨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나이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지냈다.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喰)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亡考)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亡妣), 죽은 동생(亡弟)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亡妻)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 동생(亡妹) 고파리(古巴里), 또 처(妻)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하여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이어 석미타(石彌阤) 한 구를 조성하여 돌아가신 아버지(亡考)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을 받들어 위하였다. 고인이 되자 동해(東海) 흔지(欣支)가에 흩었다. 임금의 계보를 살펴보면, 김개원(金愷元)은 곧 태종춘추(太宗春秋)의 여섯째 아들인 육자(六子) 개원(愷元) 각간(角干)이니 바로 문희(文姬)가 낳은 이다. 김지전(金志全)은 곧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東海) 흔지(欣支)는 아마 법민(法敏)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 같다.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 →  김지성(金志誠),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  아우 양성(梁誠) 소사(小舍), 성지전(誠志全) 김지전(金志全), 동해유반(東海攸反) 동해흔지(東海欣支)로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와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근거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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