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은(避隱) 제8(第八)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축산(靈鷲山)에 신이한 스님이 암자에 여러 해 살았는데, 삽량(歃良)은 지금의 양주(梁州)다. 아곡(阿曲)은 아서(阿西)라고도 하고, 또 이르길 구불(求佛) 혹은 굴불(屈弗) 이라고 한다. 지금 울주(蔚州)에 굴불역(屈弗?)을 두었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마을에서는 모두 알지 못했고, 스님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法華)을 읽어, 이에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龍朔) 연간 초에 사미(沙彌) 지통(智通)이 있어, 이량공(伊亮公)의 집에 노비였다. 17세에 출가하였는데, 이 때에 까마귀(烏)가 와서 울며 이르길, “영축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에게 의탁하여 제자(弟子)가 되어라.” 하였다. 지통(智通)이 그것을 듣고, 그 산을 찾아 골짜기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말하길, “나는 보현보살(普賢大士)로,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고자 하여, 그 까닭에 여기에 왔다.” 하였다. 이에 계(戒)를 베풀고 마치자 사라졌다. 지통(智通)은 신심(神心)을 깨닫고, 지혜가 깨우쳐지고 문득 원만해졌다.

마침 길을 가던 한 스님(僧)을 만나서 이에 낭지스님(朗智師)이 어디에 사는지를 물으니, 스님(僧)말하길, “어찌 낭지(朗智)를 묻느냐?” 하니, 지통(智通)이 신이한 까마귀(神烏)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스님(僧)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길, “내가 그 낭지(朗智)인데, 지금 당 앞에 또한 까마귀(烏)가 와서 알리니, 성스러운 아이(聖児)가 있어 스님(師)에게 의탁하려고 올 것이니, 마땅히 마중 나가 그를 맞이하라 하였다.” 이에 손을 잡고 감탄하여 말하길, “신령스런 까마귀(霊烏)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의탁하게 하였고, 나에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니, 이 어떤 상서로움인가? 마땅히 산신령(山霊)이 몰래 도운 것이다. 전하여 이르길 이 산의 주인은 변재천녀(辨才天女)라고 한다.” 지통(智通)은 그것을 듣고 울며 사례하여 낭지(朗智)에게 예배하였다. 이윽고 계(戒)를 주려고 하니, 지통(智通)이 말하길, “저는 마을 입구의 나무 아래에서, 이미 보현보살(普賢大士)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낭지(朗智)가 감탄하여 말하길, “좋구나! 너는 이미 친히 보현보살(親禀大士)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이후로 저녁 때까지 삼가하고 겸손하였으나, 지금까지 성인(至聖)만나길 염원했으나, 오히려 이르지 못했으나, 지금 너는 이미 받았으나 나는 너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는구나.” 하고는, 반대로 지통(智通)에게 예를 올리고,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普賢)이라 하였다. 지통(智通)이 말하길, “법사(法師)는 여기에 머문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까?” 낭지(朗智)가 말하길,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 572)에 처음 발을 들였으니, 지금 얼마나인지는 모르겠다.” 하였다. 지통(智通)이 산에 온 때가, 이미 문무왕(文武王) 즉위 원년 신유(辛酉, 661)이니, 계산하면 이미 135년이다.

지통(智通)은 후에 의상(義湘)의 처소에 가서, 당(堂)에 들어가 분별력을 더 기르고, 꽤나 현화(玄化)가 쓸만해졌으니, 이 사람이 추동기(錐洞記)의 주인이다.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에 머무를 때, 항상 낭지(朗智)를 뵈러 가, 초장관문(初章觀文)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하였다. 원효(元曉)가 저술을 마치고, 은사(隱士) 문선(文善)에 시켜, 글을 받들어 빨리 보내면서, 그 편(篇) 뒤쪽에 게(偈)를 지어 이르길, “서쪽 골짜기의 사미(沙弥)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동악(東岳)의 은덕(上德)은 높은 바위(高巖) 앞에 작은 티끌 불어 영축산(靈鷲山)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 날려서 용이 사는 연못(龍淵)에 던집니다.” 운운하였다.라고 하였다. 반고사(磻高寺)는 영축산(靈鷲山)의 서북에 있는 까닭에 서쪽 골짜기의 사미(沙弥)는 스스로를 이른다.

산의 동쪽에 태화강(太和江)이 있는데, 중국(中國)의 태화지(太和池)의 용(龍)을 위해 복을 심어 창건한 것으로, 까닭에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지통(智通)원효(元曉)는 모두 큰 성인(大聖)으로, 두 성인(二聖)이 공손하게 스승을 섬기니(摳衣),(道)가 높은지를 알 수 있다.

스님(師)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中國)의 청량산(淸凉山)에서 머무르며, 대중을 따라 강의를 듣고 조금 있다가 돌아왔다. 그 스님(僧)은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거주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길, “항상 여기 있는 이를 제외하고, 별원(別院)에서 온 스님(僧)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 있는 꽃(名花)과 특이한 식물(異植)을 가져와서 도량(道場)에 바쳐라.” 하였다. 낭지(朗智)는 다음날 산 중의 이상한 나무(異木)가지 하나를 꺾고 돌아와 바쳤다. 그 스님(僧)이 그것을 보고 말하길,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라 부르는데, 이것을 혁(赫)이라 하고, 오직 서축(西竺)해동(海東)의 두 영축산(霊鷲山)에만 그것이 있다. 이 두 산은 모두 제10 법운지(法雲地)의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그는 반드시 성스러운 사람(聖者)이다.” 마침내 그의 행색(行色)을 살피고, 이에 해동(海東)영축산(霊鷲山)에 사는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해 다시 알게 보게 되니, 이름이 안팎에서 두드려졌다. 고향 사람(郷人)들은 이에 그 암자(庵)를 부르길 ‘혁목(赫木)이라 하였다.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쪽 언덕에 옛 터가 있는데, 그 유적의 터이다.
영축사기(靈鷲寺記)≫에 이르길, 낭지(朗智)는 일찍이 말하길, “이 암자의 터(庵趾)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 터이다.” 하고, 땅을 파서 등항(燈缸) 2개를 얻었다. 원성왕(元聖王) 대에 대덕(大德) 연회(緣會)가 와서 산 속에 살면서, 스님(師)의 전(傳)을 지어, 세상에 내보냈다. 화엄경(華嚴經)≫을 살펴보면, 제10지 법운지(法雲地)는 지금 스님(師)의 구름을 탄 것이고, 대개 부처()가 세 손가락을 구부리고, 원효(元曉)가 백 개의 몸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지 아니한가!
찬(讚)하여 말한다.
생각하면 바위에서의 백 년 간에(想料嵓藏百嵗間),
높은 이름이 인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니(髙名曽未落人寰),
산새의 쓸데없는 말을 금하지 않았더니(不禁山鳥閑饒舌),
구름을 타는 것이 함부로 알려져 왔다갔다 하는구나(雲馭無端洩徃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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