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기라(阿道基羅)

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夲記) 제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고구려(高麗)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사람인 모례(毛禮) 혹은 모록(毛祿)이 집 안에 굴을 파서 편히 있게 하였다. 그때 (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전해왔다.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서 원표(元表)라는 사승(使僧)을 시켜 명단향(溟檀)과 불경(經)·불상(佛像)을 보내왔다고 한다. 군신(君臣)은 그 향(香)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香)을 싸들고 전국을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묵호자(墨胡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향(香)이라고 하는데, 이를 사르면 향기(香氣)가 매우 강하여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통하게 하는데 쓰인다. 신성(神聖) 3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사르며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눌지왕(訥祗王)(晉宋)시대에 해당되니 (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이때 왕녀(王女)가 몹시 위독했는데, 묵호자(墨胡子)를 불러들여 향(香)을 사르며 소원을 표하게 하니 왕녀(王女)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후하게 주었는데, 얼마 후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아도(我道) 화상(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함께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의표(儀表)묵호자(墨胡子)와 비슷하였다. 수년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고, 그 시자(侍者) 세 명은 남아 있으면서 (經)과 율(律)을 강독(講讀)하니, 왕왕 신봉자(信奉者)가 있었다. 주(注)에서 “본비(夲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서천축(西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하였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도(我道)고구려(髙麗)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에 조위(曹魏) 사람 굴마(我崛摩)가 사신으로 고구려(句麗)에 왔다가 고도령(高道寧)을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 인해서 임신하게 되었다. 성(姓)이 아(我)이다. 아도(我道)는 다섯 살에 그 어머니가 출가(出家)하게 하였다. 열여섯 살에 (魏)나라에 가서 굴마(崛摩)를 뵙고 현창(玄彰) 화상(和尙)의 강석에 나아가 배웠다. 열아홉 살 때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 불법(佛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월이 지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亰都)에는 일곱 곳의 절터(七處伽藍之墟)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륜사(興輪寺)이다. 금교(金橋)는 서천(西川)의 다리를 말하는데, 세간에서는 송교(松橋)로 잘못 부르고 있다. 절은 아도(我道)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에 이르러 처음 창건되었고, 을묘(乙卯, 553)에 크게 공사를 벌여 진흥왕(興王) 때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歧), 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輪寺)와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 지금의 황룡사(皇龍寺)이다. 진흥왕(興王)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龍宮) 북쪽, 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 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善徳王)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모두 전불(前佛)시대의 절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다. 네(爾)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방으로 향해올 것이다.”
아도(我道)가 분부를 받들고 계림(鷄林)에 와서 왕성(王城)의 서쪽 마을에 우거했는데,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나아가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하여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禄)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었다. 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하여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禄)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라는 명칭을 모르므로 아두삼마(阿頭三麽)라고 하였다. 삼마(三麽)란 향언(鄕言)의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弥)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3년이 지났을 때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의(巫醫)도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백에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착수하도록 명령하였다.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는데, 머물면서 강연(講演)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하였다.
모록(毛禄)의 누이동생 사씨(史氏)가 스님에게 귀의하여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는데, 그도 역시 삼천기(三川歧)에 절을 짓고 살았다. 절 이름은 영흥사(永興寺)라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末雛王)이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여 스님은 모록(毛禄)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돌아갔으니,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釋氏)를 일으켰다. 미추왕(末雛王) 계미(癸未, 263)년으로부터 252년 뒤의 일이다. 고도령(高道寧)이 예언한 3천여 월은 들어맞았다.
이상에 의하면, 본기(記)와 본비(碑)의 두 설(設)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 본다. (梁)·(唐) 두 승전(僧傳)삼국본사(三國史)에는 모두 고구려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이라고 하였는데, 이(二道) 법사(法師)소수림왕(小獸林)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髙䴡)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비처왕(毗處王) 때 비로소 신라(新羅)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阿道)가 고구려(髙䴡)에서 백여 년이나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하나 반드시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신라(新羅)에서의 불교 신봉이 이처럼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약 미추왕(末雛王) 때였다고 하면, 고구려(髙麗)에 온 갑술(甲戌)년보다 백여 년 전이 된다.
이때는 계림(鷄林)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國号)도 미처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髙麗)에도 오지 않은 채 신라(新羅)로 넘어갔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설사 잠깐 흥하였다가 곧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을 것이며, 향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겠는가? 어찌하여 하나는 너무 뒤지고, 하나는 너무 앞서는가?
생각건대, 동점(東漸)의 형세는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되고 신라에는 나중에 들어왔을 것이다. 즉, 눌지왕(訥祗王)대는 소수림왕(小獸林王)대와 서로 근접해 있으니, 아도(阿道)고구려(髙麗)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訥祗王)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王女)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阿道)가 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이른바 묵호자(墨胡者)라는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그저 지목(指目)한 말이다. 마치 양(梁)나라 사람들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고 하고, (晉)나라에서 석(釋)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柒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아도(阿道)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고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墨胡)·아도(阿道) 두 이름을 두 사람으로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하물며 아도(阿道)의 의표(儀表)묵호(墨胡)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으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高道寧)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잘못되었기에 이제 사천미(沙川尾)를 다섯 번째에 올려 놓는다. 3천여 월이란 것도 꼭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訥祗王) 때로부터 정미(丁未, 527)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성을 아(我)라고 하고 이름을 외글자로 한 것도 거짓인 듯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북위(元魏)의 석(釋) 담시(曇始) 혹은 혜시(惠始) 전(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담시(曇始)는 관중(關中) 사람으로 출가(出家)한 뒤로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나라 효무제(孝武)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經)과 율(律) 수십부(十部)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3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髙䴡)가 불도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초년에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와서 3보(三輔)를 개도(開導)시켰다. 담시(曇始)는 발이 얼굴보다도 희었으며, 비록 진흙탕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晉)나라 말기에 북방의 흉노(凶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關中)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때 담시(曇始)도 화를 만나기는 했으나 칼이 해치지 못하였다. 발발(勃勃)은 감탄하면서 널리 사문(沙門)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曇始)는 이에 몰래 산림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 위세를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벼슬이 위보(僞輔)가 되어 탁발도(拓拔燾)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拓拔燾)에게 ‘불교(佛敎)는 무익하고 백성의 복리에 해만 준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曇始)는 바야흐로 탁발도(拓拔燾)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 앞에 이르렀다. 탁발도(拓拔燾)가 듣고 그를 죽이라고 명했으나 여러 번 베어도 상하지 않았고, 탁발도(拓拔燾)가 그를 직접 베어도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虎)에게 물게 하려고 해도 또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탁발도(拓拔燾)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崔皓)구겸지(寇謙之) 두 사람도 차례로 악질에 걸렸다. 탁발도(拓拔燾)는 죄과가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의 가족을 죽이고 국내에 선포하여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曇始)는 그 뒤로 종족을 모른다.
논의하여 말한다. 담시(曇始)는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海東)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체류한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 역사(東國歷史)에는 기록이 없겠는가? 담시(曇始)는 본래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阿道)·묵호(墨胡)·난타(難陁) 등과 연대 및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讚)하여 말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雪擁金橋凍不開)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雞林春色未全逥)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사도 많아(可怜青帝多才思)
모랑댁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先著毛郎宅裏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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