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릉(康陵)

강릉(康陵)

13대 명종(明宗)

- 위치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번지

- 지정번호 : 사적 제201호

- 조성시기 : 1567년(선조 1) 9월 22일

- 능의구성

      강릉은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明宗)과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이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하여 쌍릉으로 조영하였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만석에 다시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진입공간에 금천교가 남아 있으며 정자각 왼편 계류에는 보면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왕래할 때 마실 물을 마시거나 제례시를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이를 볼 수 있으나 강릉의 것이 원형에 가깝다.
강릉의 문석인은 신체 대비 머리의 비례가 크고, 목이 짧게 조각되었다. 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친 관료의 차림을 하고 있다. 무석인은 왼편과 오른편의 조각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오른쪽은 투구가 작고 가슴 전면에 파도 문양이 조각된 반면, 왼쪽 무석인은 팔꿈치에 구름 문양, 등 위와 무릎 부분에 비늘 문양을 새기고 있다.

 

- 능의역사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34세의 나이로 1567년(선조 즉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를 명종, 능호를 강릉으로 정한 후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였다. 선조는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그 해 4월 28일 명종 왕릉인 강릉에 쌍릉으로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 명종(明宗) 생애이야기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34년(중종 29) 5월 22일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 12월 21일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1542년(중종 37) 11월 심강의 딸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545년 7월 6일 인종의 뒤를 이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명종이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명종 8)에는 문정왕후가 8년 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되었다. 명종은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친정이라고 해도, 큰 일은 일일이 문정왕후의 지시를 받아 처리해야 했으므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와중에 양주 출신 백정 임꺽정이 의적 행각을 벌였는데, 『명종실록』의 사신은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평할 만큼 조정은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명종은 이러한 가운데 1567년(명종 14)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 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생애이야기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중종 27) 태어났다. 1545년(인종 1) 명종이 즉위하면서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명종 6) 6월 5일에는 원자를 낳았고, 1557년(명종 12) 12월 8일 원자가 5세에 이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원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다섯 살인데도 영명하고 슬기로움이 이미 나타났으니 실로 종사의 한없는 경사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는 1563년(명종 18) 9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지 4년 후에는 남편인 명종도 승하하였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1568년(선조 1) 7월에 선조가 친정을 하도록 물러나 주었다.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의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승하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된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죽고 없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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