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릉(靖陵)

정릉(靖陵)

11대 중종(中宗)

-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9호

- 조성시기 : 1562년(명종 17)

- 능의구성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의 능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보우가 주지로 있던 사찰로,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 능의역사

      인종은 1545년(인종 1) 1월 5일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에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서 중종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고, 그곳은 풍수지리가 좋지 않으며 선릉의 동쪽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옮긴 곳이었으나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계비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되어 있다.
문정왕후의 바람으로 인해 천장된 현재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 중종(中宗) 생애이야기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3월 5일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에 대항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연산군 축출에 반대한 아버지로 인해 폐위당한 단경왕후,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까지 3명의 왕비를 두었으며, 1544년(중종 39) 11월 14일 왕세자에게 전위하고, 그 다음날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하였다.

 

2.온릉(溫陵)

온릉(溫陵)

- 위치 :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

- 지정번호 : 사적 제210호

- 조성시기 : 1739년(영조 15)

- 능의구성

      온릉(溫陵)은 제11대 중종(中宗) 원비(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陵)이다.
중종반정으로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반정공신에 의해 왕비자리에서 물러났다. 자식없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 무덤지역에 장례를 지냈으며 숙종 24년(1698)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영조 15년(1739)에 무덤 이름을 온릉으로 봉하였으며, 무덤에 조각을 만드는데 있어서 장릉을 예로 삼되 죽은 후에 왕비의 무덤으로 봉해진 정릉이나 사릉을 따르게 하였다.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원형무덤으로 무덤 주위에 양석과 호석 1쌍을 배치하였다. 동물 모양의 조각을 반으로 줄인 것은 비릉(妃陵)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에 따른 것이다.

 

- 능의역사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는 명종(明宗) 12년(1557년) 12월 7일 우거(寓居) 사제(私第)에서 소생(所生)없이 춘추(春秋) 71세로 승하(昇遐)하였으며, 친정묘역(親庭墓域)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장례(葬禮)지냈고, 신수근(愼守勤)의 손(孫) 사원(思遠)이 봉사(奉祀)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전(前) 현감(縣監) 신규(申奎)의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廟堂)의 의론(議論)이 일치(一致)되지 아니함에 숙종(肅宗)은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연경궁지(延慶宮址)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춘추(春秋)로 사당(祠堂)에 봉제(奉祭)케 하고 한식절(寒食節)엔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다. 영조(英祖) 15년(1739년) 3월 28일 익호(謚號)를 단경(端敬)으로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하였으며, 이 해 4월 능상(陵上)의 상설(象設)을 새로이 설치(設置)하면서 단종(端宗) 장릉(莊陵)의 봉릉예(奉陵例)로서 하되 추봉(追封)된 왕비릉(王妃陵)인 정릉(貞陵), 사릉(思陵)의 상설(象設)을 따르게 하였다.

 

-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생애이야기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본관(本貫)은 거창(居昌)이고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여(女)로서 성종(成宗) 18년(1487년) 1월 14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5년(1499년)에 진성대군(晋城大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부부인(府夫人)으로 봉(封)하여졌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중종(中宗) 원년(元年)(1506년) 9월 2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왕비(王妃)의 부(父) 신수근(愼守勤)은 반정(反正)으로 피주(被誅)되었으며, 죄인(罪人)의 여(女)가 왕비(王妃)로는 부적(不適)하다는 강청(强請)으로 왕비(王妃) 책봉(冊封) 7일만에 폐출(廢出)되어 사제(私第)로 나아갔다. 처음 정현조(鄭顯祖)의 집에 거처(居處)하다가 9월 24일 조부(祖父) 신승선가(愼承善家)로 이거(移居)하였다. 중종(中宗)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중종(中宗) 10년(1515년) 2월에 승하(昇遐) 후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등의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폐비(廢妃) 신씨(愼氏)는 명종(明宗) 12년(1557년) 12월 7일 우거(寓居) 사제(私第)에서 소생(所生)없이 춘추(春秋) 71세로 승하(昇遐)하였으며, 친정묘역(親庭墓域)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장례(葬禮)지냈고, 신수근(愼守勤)의 손(孫) 사원(思遠)이 봉사(奉祀)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전(前) 현감(縣監) 신규(申奎)의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廟堂)의 의론(議論)이 일치(一致)되지 아니함에 숙종(肅宗)은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연경궁지(延慶宮址)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춘추(春秋)로 사당(祠堂)에 봉제(奉祭)케 하고 한식절(寒食節)엔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다. 영조(英祖) 15년(1739년) 3월 28일 익호(謚號)를 단경(端敬)으로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하였으며, 이 해 4월 능상(陵上)의 상설(象設)을 새로이 설치(設置)하면서 단종(端宗) 장릉(莊陵)의 봉릉예(奉陵例)로서 하되 추봉(追封)된 왕비릉(王妃陵)인 정릉(貞陵), 사릉(思陵)의 상설(象設)을 따르게 하였다.

 

3.희릉(禧陵)

희릉(禧陵)

-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 지정번호 : 사적 제200호

- 조성시기 : 1537년(중종 32년)

- 능의구성

      조선 11대 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尹氏)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만을 두른 단릉(單陵)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배치나 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기둥 같은 몸체에 큰 머리를 올려놓았으며 목이 거의 없어 어깨가 약간 굽어보인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나 그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측면의 소매 주름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끝부분에 가서 반전하는 곡선이 재미있다.
 

- 능의역사

      희릉은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희릉 천릉사건이다. 이는 김안로가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주장하여 1537년(중종 32)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기고, 그와 동시에 당시 능을 조영하는데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한 사건이다.
그 뒤 중종의 정릉이 희릉의 곁에 안장되면서 동원이강 형식의 능을 취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하였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은 현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곁으로 옮겨지고 장경 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 장경왕후(后) 윤씨(尹氏) 생애이야기

      장경왕후(后)는 1491년(성종 22) 7월 6일 영돈령부사 윤여필(弼)의 딸로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궁에 들어왔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1506년 종2품 숙의()가 되었다가 150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중종실록에는 1507년(중종 2) 6월 17일 종4품 숙원에서 중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15년 세자(:)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죽었다.

 

- 일화

      희릉의 지문(誌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장경왕후를 기리고 있다.
왕후는 총혜자유한 천성을 타고 났고, 인효와 더불어 살고 예순과 함께 자라 났다. …… 이미 덕이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왕의 중흥정치의 복조를 협찬하였는데, 거의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지만 시보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 지 겨우 춘추 25세만에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것이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천명이 이렇게 가혹하고 잔인한가? 아, 애통하도다!

 

4.태릉(泰陵)

태릉(泰陵)

- 위치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번지

- 지정번호 : 사적 제201호

- 조성시기 : 1565년(명종 20) 7월 15일

- 능의구성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文政王后) 윤씨(尹氏)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頭)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능의역사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정왕후(文政王后) 윤씨(尹氏) 생애이야기

      문정왕후는 1501년(연산군 7)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대윤(大尹) 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 가운데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는 걸로 당쟁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일화

     1547년(명종 2)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게 되었다. 여기서 여왕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를 일컬은 것이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집권 초기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 문정왕후 집권 시의 정치가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당시의 대 유학자 조식이 그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적인 상소에도 조식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당대 문정왕후에 대한 위험한 언급이 금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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