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묘(燕山君墓)
10대 연산군(燕山君)
-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 지정번호 : 사적 제362호
- 조성시기 : 1506년(중종 1)
- 능의구성
조선(朝鮮) 제10대(第10代) 연산군(燕山君)과 부인(夫人)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소(墓所)이다.
묘의 시설은 대군으로 예우하여 봉분, 곡장, 혼유석, 장명등, 향로석, 재실 등을 갖췄으나, 병풍석, 석양, 석마, 사초지, 문석인 등은 세우지 않았다. 연산군의 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 뒷면에는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부인 신씨의 묘비는 전면에 ‘居昌愼氏之墓’, 뒷면에 ‘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고, 연도 부분은 마멸되어 있다.
- 능의역사
연산군은 1506년 11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부인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서, 연산군의 폐왕과 함께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죽은 뒤에는 묘를 강화에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현 위치)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1513년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 연산군(燕山君) 생애이야기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조선 10대 왕이다. 연산군의 휘(諱)는 융이며 성종(成宗) 7년 11월 6일에 탄생하여 동왕(同王) 14년(1483) 2월 6일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 동(同) 25년(1494), 12월 29일 성종(成宗)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승하하자 즉위(卽位)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실정(失政)으로 인하여 중종반정(中宗反政)을 당하여 재위12년(在位12年)(1506) 9월에 폐왕(廢王)이 되고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洞)에 추방되었다가 그해 11월(중종원년(中宗元年)·1506)에 31세(歲)로 병사(病死)하였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으며 강화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거창신씨(居昌愼氏) 생애이야기
부인 거창신씨(居昌愼氏)는 영의정(領議政)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여(女)이다.
17살이 되던 성종19년 윤1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입궁하였습니다.
1488년 2월 6일 당시 왕세자였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뤘으며, 1494년 2월 23일 원손을 낳았고, 그 해 12월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이 되자, 왕비에 책봉 됩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함께 폐출,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정청궁(貞淸宮)에서 거처하다가 중종 32년(1537)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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