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막

“에해야자! 에해야자!” …그물 곳곳 은빛 멸치떼

 

▲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을 어선에서 펼치면서 양쪽을 끌어당겨 고기를 잡는, 전통어로방식인 ‘후리 그물당기기’를 하고 있는 동구민들.

 

"오목조목 만으로 둘러싸여 

50년대 후리어장 크게 발달 
흥겨운 노동요에 몸 싣고 
너도나도 어장 후리줄 당겨 
60년대 유자망에 밀려 쇠퇴 
옛 것 향수와 추억 되새기는 
관광상품화로 ‘명맥 유지’" 

 

1950~60년대 울산의 연안에는 일제 때부터 시작된 후리어장(地曳網)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동구는 삼면이 바다와 연접해 있고, 농토가 부족하여 바다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동구의 해안은 여러 개의 오목조목한 만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주전의 후리개안, 미포의 갯방불, 녹수구미의 검불개, 전하의 오자불, 일산진, 화잠, 벋틈, 대굼멀, 쑥밭, 염포 성내 등의 연안에는 크고 작은 후리 어장이 십 수개는 족히 되었다. 당시의 연안 어업은 후리어장, 멸치불배, 칼치낚기, 주낚기(연승), 정치망 등을 곱을 수 있지만, 마을 가까이 후리어장이 있어서 이곳 농어촌의 주민들은 농사일 보다 가까운 후리막(어장)을 직장처럼 여겼기 때문에 후리막에 대한 향수와 사연들이 많은 편이다. 동구의 후리를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후리어장은 대부분은 일제 때 설치된 것인데, 1950~60년대까지 이어 왔기 때문에 기구와 작업용어 속에 일본어가 많이 남아 있었다. 후리어장을 이곳 사람들은 ‘후리막’이라 하고, 후리막에 근무하는 것을 ‘후리막 탄다’라고 했다. 어장의 선주는 경험이 많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선도로 천거해 후리막의 운영을 맡기고, 인부들 중에서 서기를 뽑아 회계처리를 맡겼다. 일반 인부들은 평소 그물의 손질과 후리막의 부속시설들을 관리하게 하고, 떨어진 그물은 깁고 말려서 불(모래사장)에 올려놓은 모선에다 잘 싸려놓고 멸치 떼가 연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멸치 떼는 바다 가운데서 큰 고기들의 공격을 받아서 연안까지 밀려오는데, 낮에는 갈매기 떼가 멸치를 채갈 때 물결의 파장을 보면 바다 속에 뭉쳐진 멸치의 량을 알 수 있고, 밤에는 생선에서 나오는 씨그리 빛으로 탐지하는데, 숙련된 선도가 먼저 전마선을 타고 연안을 돌면서 ‘씨그리불 보기’를 한다.


멸치가 연안 깊숙이 들어오면 후리가 시작되는데 어장의 모든 작업은 선도의 지시에 따라 시작된다. 우선 멸치 떼가 연안으로 들어오면, 일꾼들을 소집하는 큰 나팔을 길게 연달아 불어대는데, 후리어장마다 그 소리가 달라서 누구네 후리막에 멸치가 들었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어 정해진 어장의 인부들은 일손을 놓고, 후리막으로 달려와서 각자 맡은 바 채비를 했다.


그물이 실린 모선 아래에다 둥근 기둥 모양의 방(내림틀)을 설치하여 배를 밀어 내릴 준비를 하고 선도의 지시를 기다린다. 선도의 신호는 나팔소리인데, 1번 길게 불면 사려진 줄을 준비하라는 신호이고, 2번 끊어서 불면 배를 내리라는 신호, 3번 끊어서 불면 그물을 치라는 신호이다.


그 신호에 따라 배를 밀어 내리다가 선체가 물에 닿는 순간에 승선하는데, 모선에는 선수의 지시에 따라 노잡이는 노를 잡고, 키잡이는 키를 잡는다. 먼저 놓을 그물 끝에 사려진 줄을 걸고 뭍으로 내려주면 뭍에서는 이 줄을 이어가면서 여유 있게 풀어주다가 그물을 다 치게 되면 남은 줄을 모래사장 위에 설치된 양쪽 노구로(고정도래) 중 한 곳에다 걸어놓고 줄 당길 채비를 한다.


그물은 선도의 나팔소리에 맞추어 쳐가는데, 오동나무 토막의 뜸이 붙은 위쪽 그물과 추가 달린 아래쪽 그물이 잘 펼쳐져야 하고, 그물의 가운데 쪽에 자루처럼 달린 봇동은 멸치가 담기는 주머니 역할을 한다. 이렇게 펼쳐진 그물은 멸치 떼를 에워싼 형국으로 양쪽 줄은 뭍에 고정되어진 양쪽 로구로에다 연결해 놓고 인부들은 양쪽으로 나누어 줄과 그물을 당긴다. 로구로 잡이는 긴 목도용 막대기를 로구로 틀에다 끼워서 수명이 천천히 돌리면서 줄을 감는데, 바다에 펼쳐진 그물이 둥글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당겨야 성공한다. 


그물 양쪽 끝에 이어진 줄은 뭍에서 천천히 당기는데, 줄을 당길 때도 선도가 배를 타고 바다가운데서 좌우측의 균형을 봐가면서 나팔 소리로 신호를 보내게 된다.  짧게 한번 불면 좌측이 늘어지니 좌측 줄을 세게 당기고, 두 번 연달아 불면 우측이 늘어지니 우측이 세게 당기라는 뜻이다.


배를 내려서부터 노를 젓는 사공들은 노를 어설(밀) 때와 데릴(당길) 때도 서로 노동요 가락에 맞추어 노를 젓는다. 후리 줄을 당길 때에도 양쪽 힘의 균형을 맞출 때도 소리꾼의 선소리에 따라 후렴을 붙이면서 힘의 강약을 조절해 갔다. 

 “오시요와 오시요와 지이야 지야! 어허사 어허사 오시오! 에해야자, 에해야자!
이팔청춘 에해야자! 소년들아 에해야자! 백발노인 에해야자! 웃지마소 에해야자!…후략”  이 노동요는 당시 쑥밭에 거주하던 강이도(姜而道)씨가 제공해 울산시 발간 「내고장의 전통」에 전해진다.

 

이렇게 그물을 당기다가 멸치가 너무 많이 들면 그물이 터지기 때문에 당기기를 중단하고, 봇동의 중간 줄을 적당하게 조여 놓고 둘러싼 그물속의 멸치를 쪽자로 퍼내게 되는데, 이때에는 주민들이 가져온 쪽자로 마음대로 퍼 가도 탓하지 않았다. 이때를 대비해서 집집마다 멸치 뜨는 쪽자 하나쯤은 마련해 두고 있었다. 적당하게 멸치를 퍼낸 후에 다시 그물을 당기는데 줄이 다 올라 오고나면 아래위 그물이 엉키지 않도록 나무 가지로 만든 V자형 격자가 옆으로 걸려 있는데 이를 ‘개다리’라 부른다. 개다리가 뭍으로 올라오면 이때부터는 아래위 그물을 한데 줄로 묶어가며 그물을 당기는데 그 줄이 빠지지 않도록 손바닥만한 판자에 구멍을 뚫고 줄을 끼워 매듭을 지워 빠지지 않게 하고, 이 줄의 끝은 허리춤에 묶어놓고 그물을 감싼 줄이 밀리지 않도록 이를 끼워서 당기는데 이를 ‘고댓기’라 불렀다.


 이렇게 그물을 물가(邊)에 당겨놓고 봇동에 든 멸치를 큰 대바구니에 퍼다 목도질로 가마솥 근처에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새도록 삶아내는데, 멸치 철에는 멸치 외에는 크고 작은 생선을 불문하고 모두가 잡어로 취급하여 삶기 전에 골라 놓았다가 일을 마친 인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데, 이것은 인부들의 반찬꺼리이다. 이러한 후리 작업을 하룻밤에 두 번 치룰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멸치를 넣고 끓인 죽과 막걸리가 야참으로 제공되었다.  


이렇게 잡은 멸치들은 삶아서 말린 후에 팔기도 하고, 생멸치를 팔기도 하는데, 총매출액의 절반은 선주의 몫이고, 나머지로 선도 2배수, 선수 1.2배, 일반 등의 순으로 배당되는데, 이렇게 모인 돈은 10일 혹은 보름 간주(계산)로 지급되는데,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이러한 후리어장도 60년대에 와서 유자망(流刺網)에 밀려 후리막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옛 모습을 추억하는 관광 상품으로 계발(啓發)하여 축소판 후리광경이 서생면 나사리 바닷가에서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 울산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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