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바다와 해녀 이야기
청정바다 일군 해녀들의 뿌리는 제주
제주해녀 이주 집단거주지 ‘두모악’ 조선시대 기록남아
1950∼60년대 미역·성게·멍게·열합 등 지천에 널려
“씨종자마저 사라진 바다 볼때면 가슴 쓰리고 숨막혀”
▲ 60년대 해녀복식. 「제주옛모습」에서 전재.
▲ 방어진 섬끝마을 해녀들. 울산의 해녀는 제주도에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방어진 슬도 앞바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청각, 열합, 굴, 멍게 등이 빽빽하게 군생했다.
울산의 근교 해안가 어느 곳을 가도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그 연안을 둘러싼 갯바위들이 기암절경을 이루고 있다. 청정의 해안에서 쉴 새 없이 물속을 드나들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은 넘실되는 푸른 파도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해안에서 해녀들이 잡아오는 성게, 멍게, 해삼, 소라 등은 행락객들의 식도락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해녀들이 하는 조업의 전부는 아니다. 해녀들은 동리(洞里) 어촌계의 일원으로서 지역어촌계가 관리하는 수역 내에서만 조업을 하는데, 어촌계의 공동관리가 법제화되면서 수산자원의 보호 차원에서 주요 해조류 및 어패류 등의 채취를 엄격히 금지해놓았다가 일시 해제하는 기간에만 어로(漁撈)를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을 ‘령(令) 내림’ 기간이라 한다.
해조류의 영(令) 내림은 음력 5, 6월에 연중 2번의 영(令)내림 뿐이어서, 이 기간을 놓칠세라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도 무질을 한다. 어패류인 성게, 소라, 전복 등도 마찬가지로 금어기(禁漁期)를 일시 해제하는 ‘령(令)’이 내리면 성게, 전복 등의 채취에 전념하게 되는데 연중 한 두 번 있는 기회인지라 놓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미역은 수익성이 높은 해조류로 육지의 벼농사와도 같은 것이다. 수역내의 미역돌 숫자만큼 계원도 숫자를 나누어 매년 미역돌을 배정하는데, 미역돌(藿岩)에 대한 역사는 고려 초기로 올라가는데, 울산의 호족 박윤웅이 고려건국에 공적이 있어 체지를 받게 되는데, 그 속에 강동의 미역돌이 이에 포함된다. 미역돌은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 또 배정 받은 미역돌은 자기농장과 같아서 계절에 따라서는 미역 포자가 돌에 잘 부착될 수 있도록 미역돌에 붙은 잡초, 어패류 등을 제거하는 미역돌 깎기(매기)와 미역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군소 등을 잡아내는 일과 다 자란 후에는 미역을 채취해서 올을 지어 말리고 판매하는 일까지 육지의 농사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렇게 바다가 자신의 농장과도 같은 해녀들에게는 연안의 크고 작은 만곡과 기암절애, 갯바위, 여(암초), 물목, 돔방 등 해안 곳곳의 지명과 전설 등은 나이든 해녀들로 부터 오롯이 구전되어지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울산의 바다는 청정해역으로 해조류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어류의 산란과 치어의 생장에 모태역할을 하던 자연생태가 살아있던 바다였다. 국가 경제가 어려웠던 50~60년대, 해녀들은 성게, 앙장구(말똥성게)의 알(雲丹)을 가공하여 해외 수출 길을 열면서 외화획득의 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해녀경력자 방어동 장세자님(67)은 회고담에서 “샛날(동풍) 들어 물이 맑은 날엔 수심 아래의 수십 질 바닥도 훤히 내다보였다. 온 연안은 해조류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몰과 진저리의 숲은 낫으로 쳐서 길을 내지 않으면 해녀들이 지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멍게가 군생하는 곳을 지나면 멍게 밭은 온통 붉은 벗꽃이 만발한 것 같아 보였다. 옛날에는 연안 곳곳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바다 속 풍경인데 지금은 씨종자마저 사라지고 없어져서 안타깝다”고 회고한다.
또 방어동의 현경순 할머니는 고향 제주도에서 14세부터 무질을 시작해서 80세까지 무질을 했다. 해방 3년 전(1942)에 울산에 처음으로 왔을 때, 나이 23세 때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남편과 사별을 하고, 33세 때 아이들을 데리고 2번째로 울산으로 건너와서 이곳 동진마을에 정착했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바다는 청정했다. “슬도 앞의 무돌은 제주도 화산돌 같지만, 검지는 않았다. 돌에 구멍이 많은데, 바다 속의 바위 구멍구멍마다 소라 고동이 가득 달라붙어 있었다. …대왕암 등대 앞에도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굴이 무진장 많이 붙어있어서 잠녀(潛女) 서너 명이 잠시 잡으면 작은 덴마선(전마선)에 가득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옛날에는 청각, 열합, 굴, 멍게 등은 빽빽하게 군생을 했었는데, 지금은 씨도 없이 사라져 버린 바다를 보면 가슴이 쓰리고, 숨이 막혀온다”고 회고한다.
어린 시절 내 어멍(어머니)께서 부르던 노래 소리가 어름푸시 귀전을 스쳐간다며 가는 눈시울을 훔친다.
“…하루 종일 벌어 봐도 저녁 끼꺼리 안 나와서/ 어린아이 등에 업고 울산으로 간다네, 대마도로 간다네…” 내가 울산에 왔을 때도 나이 든 해녀들이 여기에 많이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제주해녀들이 울산으로 건너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우리 어머니의 노래가사 속에는 ‘울산으로 간다네’라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고 회고한다.
제주 해녀들은 언제부터 울산에 건너왔을까?
조선조 현종(顯宗) 13년(1672) 임자식 울산호적대장(壬子式 蔚山戶籍大帳) 부내면(府內面)에 ‘두모악(頭毛岳)’이라 하여 제주도인 190여호(戶)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두모악(頭毛岳)’이란 옛 지명에서 제주도 한라산의 고칭(古稱)으로 ‘둠뫼’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시채말로 ‘제주사람’이란 별칭이다.
또, 영조 25년(1749)의 울산읍지인「학성지」고적조에도 두모악에 대한 기록이 있다. “두모악(頭毛岳)이 세상에 전해지기를 일찍이 조정에 채복(採鰒)하여 진상(進上)하기 위해 제주의 해민(海民) 약간 호(戶)를 옮겨 왔다. 그 자손들이 성황당(城隍堂)에 살면서 채복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두모악(豆毛岳)’은 무질 때문에 건너온 제주해녀 가족들의 호구에 대한 직역 표시 대신에 ‘두모악(豆毛岳)’을 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읍지(邑誌)에 울산의 토산물 중에 바다에서 어획되는 여러 수산어종과 진상(進上) 물종(物種)은 따로 기록하고 있는데, 생전복(生鰒)과 생청어(生靑魚)가 반드시 물목에 든다.
생선어종은 낚시, 통발, 후리그물 등으로 어획할 수 있지만, 전복은 수심이 깊은 암초에 산포되어 서식하는 어패류인데, 숙련된 해녀의 자맥질이 아니면 도저히 채취하기 어려운 어패류이다. 해마다 상부에 진상(進上)할 물목을 맞추기 위해서는 바다를 끼고 있는 고을에서는 반드시 해녀들의 자맥질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당시 육지 여인네들의 긴 치마저고리는 버선발까지도 숨겨야 할 정도인 유교적 복식과 관습에 젖었을 법한데, 해녀들의 짧은 물옷과 자맥질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일제강점기 때인 1913, 5, 7 <매일신보>에는 “울산 해조(海藻) 분쟁 해결”이라는 제목 하에 당시 해녀들의 분쟁과 그들이 울산에 이주해온 발자취 등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석화채 은행초는 지난 17, 8년 전부터 제주도의 해녀가 연년이 이 지방에 와서 잠수채취에 종사하여 금일에 이르렀으며…, 해녀를 고용하고자 할 때는 부산 목도(영도)에 도항하여 머무르고 있는 해녀들과 출어 시 소요되는 비용 및 채취물의 매매 등에 관한 계약을 한 후 울산의 적정한 곳에 데려다 일을 했다.…이하생략.”
1960년대 이전의 해녀들은 모두 제주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후에는 육지의 원주민 처녀들도 함께 자맥질을 배워서 이제 그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무질하면서 품어내는 해녀들의 긴 휘파람 소리는 마치 지친 삶과 애환이 녹아나 듯 애절하고 청량하게도 들린다.
출처; 울산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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