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따라 지명 산책(2)
갯가 고을’ 울산 별호는 ‘개지변’·‘계변성’
처용암·낙화암·니굼나들 등 옛 전설 간직
신명 굼바우·녹수 검불개는 지모신 상징
바닷가 지명 선조들 문화·삶 그대로 투영
우리고장 울산의 바다도 동해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해안으로서 천혜의 경승을 이루고 있다.
바다는 오랜 옛날부터 물류수송의 대로이자,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던 수산자원의 보고이며,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주요한 공간적 일익을 담당해 왔음에도 바다와 해민(海民)들을 천시하던 우리네 구습들은 오랫동안 잔존해 왔다. 그래서 울산의 고호(古號) 중에는 개지변(皆知邊) 또는 계변성(戒邊城)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다. 이는 ‘갯가’ 또는 ‘갯가에 있는 성(고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앙 관리의 눈에 비친 울산은 ‘갯가’에 위치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농토가 부족한 갯마을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었다. 갯마을 사람들이 일구었던 삶의 숨결은 해안 곳곳에 배어 있는데, 특히 자연을 경외시 하던 그들은 영등할매와 골맥이 할미에게 자연 재액을 막아달라고 빌었다.
마을 중대소사가 있으면 먼저 당집(제당)에 제물을 차려놓고 무사고를 기원하였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의 기원은 별신굿으로, 자손의 점지는 삼신바위에 빌고, 과거급제는 미륵바위에서 빌었다.
갯마을 사람들은 하늘(자연)에 마음을 기대어 살아오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신앙과 민속들이 남아 있다. 제당과 별신굿, 지명 속에도 그 삶의 문화가 투영되어 전해져 온다. 신분적 차별과 냉소를 뛰어넘어 오히려 해학과 낭만으로 순화시킨 삶의 슬기가 곳곳의 지명 속에 비춰지기도 한다.
울산 해안의 지경(地境)은 북으로는 북구 강동동 신명의 굼바우(穴岩)에서 남으로는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비학(飛鶴)의 해안까지를 이르는데, 울산 바닷가에는 옛날 옛적의 전설을 담고 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황성동의 ‘처용암’은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곳 주변의 ‘개운포’의 지명도 처용설화와 관련된 지명이다.
▲ 신라시대 왕의 장지로 알려진 대왕암.
또 동구 일산동의 ‘대왕암’은 신라왕의 장지(葬地)로 보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왕의 유언에 따라 왕을 동해구(東海口) 경진(鯨津)의 큰바위 위에서 장사지내시니 속설에 전하기를 왕은 바다의 용으로 화하시고…, 그 바위를 일러 대왕바위(大王石)로 부른다.”는 기록에서 ‘대왕바위’라는 지명유래는 왕의 장지(葬地)임을 전해 준다. 문무왕의 장지는 감은사가 있는 동해중이니, 그 후 이곳 동해에서 장례를 치른 왕은 누구일까? 34대 효성왕(孝成王)과 37대 선덕왕(宣德王)은 동해에 산골(散骨)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38대 원성왕, 51대 진성여왕, 52대 효공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도 화장으로 장례를 쳤다.
▲ 어린 기생의 전설을 담고 있는 낙화암.
또 미포 해안에 우뚝 솟아있던 낙화암의 전설은 울산의 부사가 기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나들이 와서 풍류를 즐기다가 취흥이 무르익을 무렵 어린기생 하나가 여차여차한 일로 바다에 몸을 날려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는데, 며칠 뒤에 어린기생의 붉은 치맛자락은 파도에 실려 다니다가 작은 섬에 걸리니 그 바위를 홍상도(紅裳島)라 불렀다. 비단저고리의 소맷자락이 파도에 밀려나온 포구를 ‘녹수금의(綠袖錦衣)’라 불렀다는 지명유래가 몇 줄의 암각 시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북구의 강동해안에는 박윤웅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갈 무렵 울산의 호족이던 박윤웅은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고려 건국에 기여하게 된다. 고려태조는 박윤웅의 공훈에 따라 농소의 땅과 강동의 미역돌 12구를 식읍지로 하사하였다. 강동의 미역돌은 이후에도 박씨 후손들이 이를 관리하였는데, 미역돌에는 제각각 이름들이 붙어 있다.
▲ 강동해안의 미역돌 12구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사진은 소직인들을 관리하는 마름의 이름을 딴 마르미돌.
신명과 산하의 해안경계에서 바다로 돌출된 곳이 화암(꽃바위)인데, 이곳에 있는 바위들은 모두 검은 바탕으로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다. 이곳 해중에 길게 고래등처럼 보이는 검은 바위를 ‘마르미돌’ 이라 부르는데, ‘마름’은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옛말로, 아마도 마름의 수고로움의 대가로 정해진 미역돌인 듯하다. 정자 아래 판지마을 앞 해중에 있는 미역돌을 ‘양반돌’ 혹은 ‘윤웅바위’라 부르는데, 옛날 고려건국 공신 장무공(莊武公) 박윤웅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아 고려 때의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강동 신명의 지모신 굼바우.
우리고장 해안마을에 얽힌 숱한 이야기들은 지명 속에 투영되어 전해오는데, 지명 속에 숨겨진 마치 암호 같은 이야기를 풀어보자! 옛날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 마음을 기대어 살면서 ‘지모신(地母神)’을 ‘’이라 하고, 대응하는 ‘수신’을 ‘수(隧
또 오랜 세월 동안 ‘검·감’ 등의 지명들은 ‘험·함’ 등으로 변했다가 ‘엄·암’ 으로 정착되기도 하는데, 이를 람스테트(1939)는 알타이 친어족에서 ㄱ의 반사형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파열음‘ㄱ’소리가 약해지면 ‘ㅎ’이 되거나 아예 소리 값을 잃어버려서 ‘구물구물 > 후물후물 > 우물우물’로, ‘곰 > 홈 > 옴’로 소리가 옮겨간다고 설명한다. 주전동의 ‘홈(훔)골’역시 뿌리 말은 ‘곰(굼)골’이며, 대안의 ‘우음이’도 뿌리말은‘굼골’인데, ‘움골’로, ‘움’을 연음으로 발음하여‘우음이’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강동의 바닷가에 연해있는 마을로는 신명, 화암(花岩), 정자(亭子), 구유, 판지, 복성, 제전, 우가포, 당사, 구암 등인데, 북정자 해안에서 바다로 깊숙이 돌출된 곳이 화암이다. 화암(花岩)의 토박이말은 ‘꽃바위’인데, 동구 방어동에도 ‘꽃바위(花岩)’마을이 있다. 꽃바위(花岩)마을은 둘 다 바다로 깊숙이 돌출된 곳인데, 두 곳 모두 뿌리말은 ‘곶바위(串岩)’이다. 곶(串)이 붙은 지명으로는 ‘호미곶ㆍ간절곶·장산곶’등은 모두 물가로 돌출된 곳의 지명이다. 꽃(花)의 옛말도 ‘곶’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지명에서 곶(串)과 꽃(花)은 모두 우리말 ‘곶(串)’을 표기한 것인데, 한자지명을 자의(字義)대로 해석하여 땅이름의 어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동구의 해안 마을은 주전의 사을끝, 미포의 감불, 전하 녹수구미와 오자불, 일산 고늘개의‘니굼나들’과 대왕암의 큰불자리, 방어진 꽃바위의 대굼멀과 섬끝 해안에도 많은 음양석의 해학적인 이름과 전설을 담고 있다. 남구의 해안마을로는 매암동의 화살대를 길렀다는 양죽, 고래잡이 항 장생포, 용잠동의 이모끝, 남화동의 뭍끝과 큰개안, 용연동의 거랑채와 하바대, 황성동의 서망개와 처용암이 있고, 온산읍 처용리의 자갈채와 짝박섬, 방도리의 동백섬과 노리섬, 산암리의 거무도와 사나뱅이, 이진리의 버머리끝과 배나리, 대정리, 원산리, 당월리, 우봉리, 강양리, 서생의 왜성을 비롯하여 진하 명선도, 간절곶 이길곶봉수대 등, 바닷가 지명 중에는 옛사람들의 찡한 삶의 이야기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채로 지명 속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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