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8년~9년

 

8년(989) 봄 2월 경진(庚辰).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듣건대 조야(朝野)의 관리와 백성 가운데 병에 걸린 사람이 의원(醫員)을 보지 못하고, 또 약물(藥物)도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한다. 내가 간절하게 이들 모두에게 의원(醫員)과 약물(藥物)을 하사하고자 하나, 예로부터 또한 모든 사람에게 전부 베풀어주었다는 글이 없었다. 이제부터 중앙과 지방의 문관(文官) 5품과 무관(武官) 4품 이상으로 병을 앓고 있으면 소속 관청[本司]에 아울러 명하여 들리는 것을 갖추어 적으면 시어의(侍御醫)와 상약직장(尙藥直長)·태의(太醫)·의정(醫正) 등을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다스리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표(表)를 올려 감사하였다.

여름 4월 임술(壬戌).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학교를 일으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 스승[函丈]이 곳을 크게 열고 그들을 공경할 사람을 널리 모아 전장(田庄)을 주어 학업을 익히게 하며 문장에 능하고 박학(博學)한 이를 보내 스승으로 삼게 하고자 한다. 해마다 갑을과(甲乙科)를 행하여 뛰어난 인재를 구하고 날마다 숨어사는 선비를 찾아 걸출한 인물을 기다릴 것이며, 박식(博識)한 선비를 힘써 얻어 나의 정치를 돕게 할 것이다. 진군(進軍)할 때는 게으르지 않으며 어진 이를 기다릴 때는 피곤함도 잊는 법이다. 그러나 쇠털처럼 공부하는 자는 많으나 기린의 뿔처럼 이루어지는 인재는 매우 적다. 헛되이 국학(國學)에 이름만 매어 놓고 시험장에서 재주를 겨루는 이는 드무니, 나는 정사를 보다가도 생각이 엉겨 있으며 자나 깨나 걱정한다. 요즈음 해당 관청에서 천거하여 올린 사람들의 이름을 살펴보니, 오직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과 나주목(羅州牧)의 경학박사(經學博士) 전보인(全輔仁)이 이끌어 잘 도와서 학문을 널리 닦으라는 공자(孔子)의 뜻에 합치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아서 내가 학문을 권장하는 뜻에 들어맞으니 마땅히 그들을 발탁하여 칭찬하는 은혜를 더하여 특별하고 두터운 총애를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을축(乙丑). 태묘(太廟)를 짓기 시작하였다.

계유(癸酉),  왕이 태묘(太廟)로 가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자재를 날랐다.

5월 신묘(辛卯). 수시중(守侍中) 최승로(崔承老)가 죽었다.

9월 갑오(甲午).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사면령을 내렸다.

겨울 12월 병인(丙寅).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당(唐) 태종(太宗)은 매번 그 부모의 기월(忌月) 때마다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천하의 사찰(僧寺)에 칙령(勅令)을 내려 닷새를 기한으로 분향(焚香)하고 수도(修道)하며 염불(念佛) 외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삼았다. 하물며 나는 어려서 민손(閔損)처럼 어머니를 여의고 자라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여, 크나큰 은혜를 갚을 길 없어 추모하는 마음이 매번 간절하니 어찌 지나간 사례를 따라 나의 회포를 펴지 않겠는가? 오늘부터 태조(太祖)의 기재(忌齋)와 아버지 대종(戴宗)의 기재 때에는 닷새를 기한으로, 어머니 선의왕후(宣義王后)의 기재(忌齋)에는 사흘을 기한으로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고 염불(念佛)을 외도록 하라. 인하여 그 달에는 도살을 금지하고 고기반찬을 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정축(丁丑). 최득중(崔得中)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시랑(侍郞) 한인경(韓藺卿)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위덕유(魏德柔)를 송(宋)에 보내니, 황제가 모두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았다.

9년(990) 여름 6월 송(宋)에서 광록경(光祿卿) 시성무(柴成務)와 태상소경(太常少卿) 조화성(趙化成) 등을 보내, 왕에게 추성순화공신(推誠順化功臣)을 책봉(冊封)하고 식읍(食邑) 1,000호와 식실봉(食實封) 400호를 더하였으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하였다. 왕이 책봉을 받고 교형(絞刑)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가을 9월 병자(丙子).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무릇 국가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에 힘써야 하니, 근본에 힘쓰는 데 효(孝)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근본으로 삼았던 일로서 모든 일의 실마리이며 온갖 선행(善行)의 주체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漢)의 황제는 양인(楊引)이 어버이를 받든 것을 아름답게 여겨 정문(旌門)을 세워 마을을 표창하였으며, 진(晉)의 황제는 왕상(王祥)의 지극한 효성을 칭찬하여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의 이름을 적게 하였다. 나는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자라서는 용렬(庸劣)하고 우매(愚昧)함에도 불구하고 고탁(顧托)을 이어받아 종묘(宗廟)를 이어 지키게 되었다. 할아버님의 평생을 떠올려 생각하니 세월이 빠르게 흐름에 애달프고, 형제간의 옛 일을 매번 생각할 때마다 간절한 정[鴒原]이 더욱 사무친다. 이로서 6경(經)의 법칙을 취하고 삼례(三禮)의 규범에 기대어 저 온 나라의 풍속이 다섯 종류의 효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요사이 사자(使者)를 6도(道)에 보내 교조(敎條)를 반시(頒示)하고, 기근으로 서로 떨어진 노약자를 구휼하고 궁핍한 홀아비나 고아를 진휼하는 한편, 효자(孝子)와 순손(順孫) 및 의부(義夫)와 절부(節婦)를 구하여 찾았다.
전주(全州) 구례현(求禮縣) 백성인 손순흥(孫順興)은 그 어머니가 병들어 죽자 초상화를 그려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씩 무덤을 찾아가 음식을 올리길 살아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운제현(雲梯縣) 기불역(祇弗驛)의 백성 차달(車達) 형제 3인은 나이 든 어머니를 함께 봉양(奉養)하였는데, 차달(車達)이 그 처가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자 곧 버리고 이혼(離婚)하니 두 동생도 또한 혼인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효도로써 봉양하였다. 서도(西都) 모란리(牧丹里)의 박광렴(朴光廉)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이레에 갑자기 마른 나무를 보았는데, 완연(宛然)히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집으로 짊어지고 와서 예를 다해 봉양하였다. 남해(南海) 낭산도(狼山島) 백성 능선(能宣)의 딸 함부(咸富)는 그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려 죽자 침실에다 빈소(殯所)를 두고 무릇 다섯 달 동안 음식 올리기를 평소 살아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하였다. 경주(慶州) 연일현(延日縣) 백성 정강준(鄭康俊)의 딸 자이(字伊)와 경성(京城) 송흥방(宋興坊)에 사는 최씨(崔氏) 여인은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개가(改嫁)하지 않고 효도로 시부모를 섬기고 아이들을 잘 어루만져 길렀다. 절충부별장(折衝府別將) 조영(趙英)은 어머니를 집 뜰에 장사지내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함부(咸富) 등 남녀 7인에게는 모두 명령을 내려 정문(旌門)을 마을에 세워 주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차달(車達) 형제 등 4인에게는 역(驛)의 일을 면제해주고 섬에서 나오게 한 다음 그들의 바라는 바에 따라 주현(州縣)의 호적에 편입시키며, 순흥(順興) 등 5인에게는 관직과 품계를 내려 효도를 선양(宣揚)하도록 하라. 이제 기거랑(起居郞) 김심언(金審言) 등을 보내 그들에게 가서 사람마다 곡식 100석(石)과 은그릇 2사(事), 채색 비단 및 베를 모두 68필(匹)씩 하사하고, 조영(趙英)에게는 관등을 10등급 뛰어 올려 은청광록대부 검교시어사헌 좌무후위익부낭장(銀靑光祿大夫 檢校侍御司憲 左武侯衛翊府郞將)를 내리고 인하여 공복(公服) 한 벌과 은 30냥(兩)과 채색 비단 20필을 하사한다. 아아! 임금은 모든 백성의 우두머리이고 모든 백성은 임금의 복심(腹心)이니, 만약 착한 일을 하면 이는 곧 나의 복이고 만약 나쁜 일을 저지른다면 또한 나의 근심이 될 것이다. 어버이를 받드는 효행을 밝게 드러냄으로써 풍속을 아름답게 만든 마음을 표창하려 한다. 시골의 무지한 백성들조차도 오히려 부지런히 효도를 생각하는데, 벼슬하는 군자(君子)가 선조 받들기를 게을리 하리오? 집안에서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에도 충신(忠臣)이 될 것이니 무릇 모든 사서(士庶)는 나의 말을 되새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기묘(己卯)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기회에 부응하여 세상에 내려와서 큰 덕으로 사람을 대하시니, 모든 고을이 내조(來朝)하여 삼한(三韓)이 편안해졌다. 존귀한 자리에서 남면(南面)하면서 서경(西京)을 처음 설치하고, 종실(宗室)의 친족을 보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직무를 나누어 맡김으로써 각자 권한을 가지도록 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을 맞아 직접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오랑캐를 막아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패업(霸業)을 공고히 하셨다. 그 후 성자(聖子)와 신손(神孫)들께서 서로 이음으로써 사직(社稷)이 편안해지니 혹은 전의 발자취에 기대어 따라가기도 하였고 혹은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떠나보냈으니, 때가 닥치면 왕명(王命)으로 결정하니 역대의 풍속이 달랐다. 내가 그릇되이 부족한 재주로 외람되게 일찍이 돌아보고 의탁한 것을 이어받았으니, 선왕 때의 성대한 덕화를 생각하면 매번 간절한 마음으로 따르려 하고 지나간 날의 굉장한 계획을 듣자면 마치 얼굴을 맞대고 가르침을 받는 듯하다. 이제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들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다만 관문(關門)과 산하(山河)의 형세를 살필 뿐 아니라 장차 아울러 백성의 안위(安危)를 알아보고 지방 관리의 숫자를 덜거나 더하며 산천(山川)에 올리는 제사를 깎거나 정하려는 것이다. 그 행차(行次)의 의장(儀仗)과 모시고 따르는 관료, 식사[御膳]와 악관(樂官)은 모두 마땅히 줄이고 덜어내며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과 연로(沿路)에 있는 주현(州縣)의 수령(首領) 및 여러 진(鎭)의 지휘관은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하라. 검소하게 하라는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들의 번화(繁華)한 풍습을 경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갑자(甲子). 왕이 서도(西都)에 가서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순(舜)이 태산(泰山)을 순수(巡狩)하던 해에는 제후(諸侯)가 사슴 떼처럼 모여들었고, 당(唐) 황제가 낙양(洛陽)에 행행(行幸)하던 날에는 온 세상이 다 새로이 살아났다. 이런 까닭으로 덕의(德義)를 펴는 풍습을 멀리까지 펴고 각 지방을 살피는 의례를 크게 거행하니, 먼 옛 일을 증명으로 삼아 때에 맞추어 행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외람되게도 왕위[靈圖]를 계승하면서 선왕들의 위업(偉業)을 높이려고 생각하였으나, 참으로 남면(南面)한 때로부터 10번 여름과 겨울이 바뀌도록 아직 서경(西京) 순행(巡幸)의 의례를 펴지 못하였기에 거듭 가서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선조(先祖)의 길을 좇고 「월령(月令)」의 마땅함을 따라 몸소 관하(關河)를 살피고 백성을 두루 돌아보니, 농사와 누에치기는 풍년이 들었고 사람과 만물은 크게 편안하였다. 연로(沿路)에 있는 각 고을의 관리와 농민, 촌로(村老)는 길옆에서 환호하고 수레 앞에서 절하고 춤추었으며, 다투어 선물을 바치는[執贄] 예를 올리면서 다 함께 임금께서 오신 데에 대한 기쁨[來蘇]의 뜻을 표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도운 바이지 부족한 내가 감당할 수 없다. 마땅히 크고 어진 은혜를 베풀어줌으로써 중흥(中興)의 기운을 경하(慶賀)해야 마땅하다. 호종(扈從)한 신료(臣僚) 및 서경(西京) 등의 여러 주군(州郡)에서는 현재 금령(禁令)을 당하여 갇혀있는 무리 가운데 십악(十惡)을 범한 자를 제외하고 교형(絞刑) 이하의 죄인을 모두 출옥(出獄)시키도록 하라. 평양부(平壤府)와 개주(開州)·평주(平州)·황주(黃州)·동주(洞州)·안주(安州)·봉주(鳳州)·신주(信州)·백주(白州)·정주(貞州)·염주(鹽州)·해주(海州) 등의 주와, 우봉현(牛峰縣)·토산현(兎山縣)·수안현(遂安縣)·토산현(土山縣)·십곡현(十谷縣)·협계현(俠溪縣)·덕수현(德水縣)·강음현(江陰縣)·임진현(臨津縣)·옹진현(瓮津縣)·함종현(咸從縣)·군악현(軍岳縣) 등의 현 및 안성역(安城驛) 등 11개 역에 쌀과 곡식 9,375석(石)을 하사하라.
서경(西京)에 들어와 있는 관리로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각각 차등 있게 후한 상을 하사하되, 3품 이상은 공복(公服) 1습(襲)을, 5품 이상은 채색 비단 2필(匹)과 복두(幞頭) 2매(枚), 차 10각(角)을, 9품 이상은 비단 1필과 복두 1매, 차 5각을 주라. 관리 중에 어머니나 처가 80세인 자에게는 3품 이상은 베 14필과 차 2근(斤)을, 5품 이상은 베 10필과 차 1근을, 9품 이상은 베 6필과 차 2각을 주라. 서인(庶人) 남녀로 나이가 100세 이상 된 자에게는 경관(京官) 4품은 명하여 그 집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겸하여 베 20필과 벼 10석을, 90세 이상에게는 베 4필과 벼 2석을, 80세 이상인 자 및 중환자에게는 베 3필과 벼 2석을 하사하라. 어가(御駕)를 따른 군인 중에서 부모의 나이가 80세인 자가 있으면 먼저 동경(東京)으로 가서 문안 인사를 허락한다. 아아! 하늘과 땅은 만물을 덮고 실어서 간섭함이 없는 은혜를 멀리서부터 끼치고, 해와 달은 하늘을 돌면서 사심 없는 빛을 완전히 비춘다. 마땅히 나의 행차가 지나는 곳마다 진실로 비와 이슬이 만물을 적시는 것처럼 고루 드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월 무신(戊申). 조카 왕송(王誦)을 개령군(開寧君)으로 삼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주(周)는 자손들[麟趾]을 각 지역에 봉하기 시작함으로써 변방[藩屛]을 예(禮)로 높였고, 한(漢)은 서로 맞물린 땅에 황족을 봉하는 제도[犬牙之制]를 만듦으로써 황실과 제후[宗支]의 의를 돈독하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온 천하에 큰 명령을 펼 수 있었으며, 아득한 후대에까지 황실과 제후의 관계를 굳게 할 수 있었다. 저 선왕(先王)의 공렬(功烈)을 추앙하는 나로서는 아무 이의가 없다. 숭덕궁(崇德宮)의 적자(嫡子)인 왕송(王誦)은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나의 조카[猶子]이다. 어릴 때부터 정도(正道)를 길러 겨우 대여섯 나이에 덕이 법을 넘지 않았으며 이미 성인(成人)과 같은 기량을 쌓았다. 옛 책을 두루 살펴보고 옛날의 풍속을 상고해 보니, 친족(親族)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백세(百世)의 좋은 규범이고 어린이를 자애롭게 대함은 오상(五常)의 바른 뜻이다. 비록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나이지만 내가 감히 봉토를 내려주는 것을 아끼겠는가? 장차 미래에 앞으로 훌륭한 공적을 이루어 낼 것이니 처음으로 특별한 은총을 드러내 내린다. 이제 정사(正使) 공관어사 지도성사(工官御事 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부사(副使) 전중감(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책봉하여 개령군으로 삼는다. 너는 집안에서부터 나라로 효를 옮겨 충성하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규범을 따라 위의(威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예악(禮樂)과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익히고 부지런함을 존숭(尊崇)하도록 하라. 호사(豪奢)에 힘쓰지 말고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며 농사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의 정교(政敎)를 도우도록 하라. 공경하고 삼가라. 나의 명령을 그만두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해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삼대(三代)의 시서(詩書)를 불살라버렸지만, 한제(漢帝)가 기회에 부응해 오륜(五倫)에 관한 서적을 널리 퍼뜨렸다. 우리나라가 처음 열리던 시작은 신라(新羅)가 망하고 난 뒤라 글자로 기록된 문서는 모조리 화롯불에 타버리고 귀중한 문헌은 진흙탕에 내팽개쳐졌다. 여러 선왕(先王) 이래로 망실(亡失)된 서적을 다시 베끼게 하고 빠진 부분은 연이어 적어 넣게 하였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 더욱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지난날 편찬하던 책은 이어서 편찬하고 당년(當年)에 보충하던 것은 계속해서 보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은사(隱士) 심약(沈約)의 책 20,000여 권은 베껴서 비서성(秘書省)에 두고, 사공(司空) 장화(張華)의 책 30수레는 백호관(白虎觀)에 보관하게 하였다. 또한 4부(部)의 전적(典籍)을 모아서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관청 창고에 쌓아두고자 한다. 이로써 학생들은 저자를 돌아보는 수고를 덜고 선생들은 강석(講席)에서 경서(經書)를 잡고 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진한(秦韓)의 옛 풍속으로 하여금 공맹(孔孟)의 유풍(遺風)을 알게 하고, 아비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는 법을 깨닫게 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익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하여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하게 하고,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사적(史籍)을 초록(抄錄)하여 보관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병관시랑(兵官侍郞) 한언공(韓彦恭)을 송(宋)에 보내 사은(謝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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