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4년~5년

 

4년(985) 여름 5월 송(宋)에서 태상경(太常卿) 왕저(王著)와 비서감(秘書監) 여문중(呂文仲)을 보내 왕에게 더하여 책봉하였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내가 큰 강역(疆域)에 살면서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드니, 온 나라가 조정(朝廷)에 들어와서 빈공(賓貢)의 모습에 들어맞는다. 삼한(三韓)의 옛 땅은 본디 예의(禮義)와 겸양(謙讓)의 나라이므로, 신령스런 거북[玉靈]으로 길일[剛辰]을 점쳐서 금인(金印)으로 마땅히 총애하는 명을 더해야 한다. 이에 대대로 이어온 덕을 드러냄으로써 우리 조정의 은혜를 빛내려고 한다. 대순군사 광록대부 검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 고려국왕(大順軍使 光祿大夫 檢校太保 使持節 玄菟州都督 上柱國 高麗國王) 식읍(食邑) 2천 호(戶) 왕치(王治)는 큰 바다의 신령한 기운을 받고 봉래산[蓬壺]처럼 빼어난 인재로 태어났다. 선정(先正)으로부터 왕업을 이어받았으니 선대의 덕을 이은 훌륭한 자손이라 하겠으며, 중국(華)의 풍속이 지닌 성교(聲敎)를 흠모하니 그 높은 절의(節義)를 두루 보겠다. 스스로 천자[北闕]를 구름 보듯이 하고 자기 나라[東藩]를 땅을 비추듯 하니, 덕화가 행해져서 바다는 물결조차 일지 않고 은혜가 부합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받았다. 덧붙여 배에 보배를 싣고 조공(朝貢)을 하며, 서계(書契)는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의관(衣冠)은 추로(鄒魯)의 맵시를 따르며 봉작(封爵)의 명을 받아 산하(山河)를 지킬 맹세를 지키니 중국의 울타리[外屛]로 우뚝 솟아 모두들 어진 신하라고 일컫는다. 마땅히 은택을 고루 뿌림으로써 공에 보답[疇庸]해야 하므로 이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명을 내린다. 높여 한부(漢傅, 太傅)로 삼고 후작(侯爵)으로 승진시키니, 늘 백제(百濟)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長淮)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라. 아! 해와 달이 비치는 바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데 귀함이 있고, 번개와 비가 행해지면 이는 크나큰 경사[覃慶]라 칭송하게 된다. 그대는 인(仁)을 머리에 쓰고 의(義)를 차고 다니며 효(孝)에 옮기고 충(忠)에 바탕을 두면서, 큰 나라의 영광에 경복(敬服)하여 참 임금의 특별한 예우[異數]를 누리며 동쪽 땅에 도읍하여 중국[天朝]을 엄숙히 받들고 있다. 특별히 검교태부(檢校太傅) 벼슬을 내리고 전례에 의거하여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충대순군사 고려국왕(使持節 玄菟州諸軍事 玄菟州都督 充大順軍使 高麗國王)이라 하며 식읍 1천 호를 더한다. 산직(散職)과 관직(官職)과 훈직(勳職)은 종전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황제(皇帝)의 책명(冊命)을 받고 사면령을 내려 말하기를,
“하늘은 위에 있으면서 봄을 행하여 만물을 낳는 공을 펴며, 왕은 청정한 마음을 지키면서[守中] 세상을 건져 은혜롭고 조화로운 덕을 뿌리게 된다. 큰 믿음이란 사계절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길이 만물[靡虧]을 기르는 것이며, 지극한 도란 만상(萬象)을 자연스럽게 따르더라도 나라를 다스림에는 법도가 있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사람들에게 밝은 도리를 보이고 해와 달은 같이 떠올라 광명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외람되게도 종묘(宗廟)를 지키고 있으나 실은 매우 어리석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옷을 입으며 걱정하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짐을 느껴 조심하고 조심하게 되며, 깊은 밤에 글을 볼 때마다 말을 타고 달려가듯 품어 저절로 부지런하게 된다. 변하지 않는 법을 지키는 것이 절실하고 사대(事大)에 부지런하여, 조공[鵠籠]을 보내기 위하여 멀고 험한 길[浮天之險]을 건너갔으며 또한 글[鳥迹]을 올려 우리의 풍토에 맞는 토산물을 보내는 것에 대해 알려 왔다. 이제 조서(詔書)로 우리나라[震域]를 빛내고 떨쳤으며 역마를 타고 온 사신[星軺]의 명을 통해 우리나라[仁邦]를 예로서 중히 여기면서 1품을 내려 높은 지위에 앉히고 삼사(三師)에 올려 중한 임무를 부쳤다. 이미 나라에 경사가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기쁨도 함께 드높여야 할 것이므로, 이에 백성을 구원하는 은전을 아름답게 베풀어 신령을 품은 이들의 여망을 달래려 한다. 이제 나라 안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니 송[大朝]이 남교(南郊)에서 대사면을 시행한 뜻[南郊赦旨]을 따르는 것이며, 그리고 태평흥국(太平興國) 10년(985)을 고쳐 옹희(雍熙) 2년(985)으로 삼는다. 아! 나는 잡다한 정무를 근심하여 다시금 간소한 법령의 시행을 약속하며, 여러 백성을 생각하니 늘 우(禹) 임금처럼 눈물을 쏟는다. 다시 여러 재상과 지방관 및 훈신(勳臣)에 기대어 조정의 의례를 엄격히 바로잡고 백성의 여망에 크게 부응함으로써 반드시 하여금 나의 일월(日月)을 머리에 이고 다함께 승평(昇平)을 즐기게 할 것이며, 하여금 나의 건곤(乾坤)에 있으면서 모든 제도를 같이 누리도록 할 것이다. 이 사면의 글을 하루에 5백 리씩 신속히 전달할 것이며 감히 사면 이전의 일을 말하는 자는 죄로 죄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량(秦亮)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송(宋)이 장차 거란(契丹)을 쳐서 연주(燕州)와 계주(薊州)를 수복하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거란(契丹)과 땅이 맞닿아 있어 자주 침공을 받자 감찰어사(監察御史) 한국화(韓國華)를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논하여 말하기를,
“짐(朕)이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풀과 나무, 벌레, 물고기(草木虫魚)들도 은택을 입지 않은 것이 없으며 중국[華夏]과 오랑캐[蠻夷]도 모두 따르지 않음이 없지만, 어리석은 저 북쪽 오랑캐(北虜)만은 황제의 경략(經略)을 함부로 침략하였다.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는 원래 중국의 땅(中朝土)으로 진(晋)과 한(漢) 때 변고가 많아 못난 오랑캐들이 훔쳐 의지하였다. 지금 나라의 빛이 비추어 미치는 곳에는 모두 제도가 크게 같은데, 어찌 그곳 백성들이 광패(狂悖)한 풍속에 빠져 있도록 하겠는가? 이제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서 요망한 기운[妖氛]을 거의 없앴으며, 큰 전차(戰車)가 일어나 길을 나누어 나오고 있으니 곧 없애기를 기약하고 경사스레 한데 섞일 것이다. 왕은 중국의 풍속[華風]을 흠모한지 오래되었고, 밝은 지략을 본디부터 지녔으며 충순(忠順)한 절개를 본받아 예의의 나라를 어루만져왔다. 그러나 저 견융(犬戎)과 접해 있어 늘 나쁜 독에 근심하였으니, 그 쌓인 분노를 풀어버릴 수 있는 때는 바로 여기 있지 않겠는가! 군사들에게 깨우침을 펴서 번갈아가며 적과 맞서고 이웃나라와 화합하여 힘을 합쳐 적을 소탕할 것[盪平]이며, 떨쳐 일어나 한 번 씩씩하게 북을 쳐 저 거의 망해가는 오랑캐를 쳐부수어야 한다.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니 왕은 잘 생각하라. 노획하는 포로와 가축, 재물과 병장기 등은 모두 그대 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내려줌으로써 포상을 베풀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시일을 끌며 군사를 일으키지 않자 한국화(韓國華)가 위협과 덕행으로 달랬다. 왕이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서쪽에서 만나기를 허락하자 한국화(韓國華)가 이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길로 삼았는데 여진(女眞)은 우리에게 적을 끌어다가 분란을 엮었다 말하고, 송(宋)에 말을 바치러 가서는 그로 인하여 무고(誣告)하고 참소(讒訴)하기를, “고려(高麗)가 거란(契丹)과 더불어 그 세력의 도움에 기대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수령(韓遂齡)이 송(宋)에 가자 송(宋) 황제는 여진(女眞)이 올린 급함을 고한 목계(木契)를 꺼내어 한수령(韓遂齡)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본국(本國)에 돌아가 말하여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한국화(韓國華)가 이르자 왕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진(女眞)은 탐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저번 겨울 거듭 목계(木契)를 급히 보내어 거란(契丹) 군사들이 장차 그 땅에 이른다고 말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거짓인지 의심스러워 즉시 구원하지 못하였소. 거란(契丹)이 과연 이르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갔소. 그러자 남은 족속들이 도망쳐서 우리나라의 회창(懷昌)·위화(威化)·광화(光化)의 땅으로 들어오니 거란(契丹) 군사가 쫓아와 사로잡아 가면서 우리 수졸(戍卒)에게 이르기를, ‘여진(女眞)이 매번 우리 국경 시골을 쳐들어와 도적질하므로 이제 우리는 그 원수를 갚고 군사들을 정비해서 돌아간다.’라고 하였소. 이에 여진(女眞)에서 도망쳐 온 2,000여 명에게 모두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는데, 뜻하지 않게 도리어 몰래 군사를 갑자기 들여 우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거나 도적질하였으며 장정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모두 노예로 삼았소. 그런데도 대대로 중국(中朝)을 섬겨와 감히 원수를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도리어 서로 무고하여 성총(聖聰)을 현혹할 줄 기약하였겠소? 우리나라는 대대로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고 삼가 공물을 바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들고 있으니 감히 두 마음을 가지고 외국과 교통하겠소? 하물며 거란(契丹)은 요해(遼海) 바깥쪽에 끼어 있으며 또 우리와는 큰 강을 두 개 사이에 둘 정도로 험해 따를 만한 길이 없소. 또 여진(女眞)에서 피난을 와 우리나라에서 벼슬을 받는 자가 10여 인이 아직 있으니, 바라건대 경궐(京闕)에 불러다가 입공(入貢)하는 사신들과 대질[庭辨]하게 하면 거의 사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원컨대 황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한국화(韓國華)가 허락하였다.

겨울 10월 집을 희사하여 사원(寺院)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였다.

5년(986) 봄 정월 거란(契丹)이 궐열(厥烈)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였다.

3월 최영린(崔英藺)을 급제(及第)시켰다.

처음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부르도록 하였다.

가을 9월 기축(己丑)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상제(上帝)는 말을 하지 않아도 별들을 벌여 놓아 아래 세상을 비추며, 임금은 교화를 베풀 때 덕망과 재주를 갖춘 이들을 빌려 지방을 나누어 다스리는 법이다. 내가 비록 몸은 구중궁궐[九掖]에 있으나 마음은 언제나 백성에게로 향하고 있다.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풍조와 덕화를 맑게 하고 귀한 가문의 인재를 뽑아 지방 수령으로 파견하니,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청렴과 공평함을 숭상하여 풍속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능히 뽑을 만한 사람이 드물어 일이 늦추어질까 두렵다. 다시 마음에 아로새겨 힘쓸 기회를 열어주고자 특별히 간곡한 뜻을 내린다. 무릇 너희 목민관(牧民官)은 옥송(獄訟)을 지체하지 말고 창고를 제대로 채우며, 곤궁한 백성을 진휼(賑恤)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열심히 장려하며, 부역과 조세를 가볍게 하고 일을 처리할 때 공평하여야 한다. 삼가 끝을 잘 맺고자 한다면 그 처음을 따라야 하고, 장차 흐르는 물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 근원부터 맑게 해야 한다.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아 남이 이로울지언정, 샘물을 다 마시거나 초를 다 태우는 것 안 된다. 이와 같이 하면 옥에는 억울함이 뭉쳐 있지 않고, 길에 떨어뜨린 것을 줍지 않으며,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 삶을 즐기고 집집마다 여럿이 그 생업에 편안할 것이다. 우주[金渾]가 돌아감에 해와 달과 다섯 행성을 거느림으로써 빛을 더하고 계절[玉燭]의 순환은 사시(四時)를 거느림에 법도가 있게 되는 법이니 무릇 지방(外方)에 있는 백관(百官)은 힘써 따르고 잊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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