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6년~7년

 

6년(987) 봄 3월 갑자(甲子). 대광(大匡) 최지몽(崔知夢)이 죽었다.

가을 8월 을묘(乙卯). 이몽유(李夢遊)에게 명하여 중앙이나 지방에서 올리는 주(奏)와 장(狀) 및 관청끼리 주고받는[行移] 공문(公文)의 양식을 상정(詳定)하도록 하였다.

이 달에 정우현(鄭又玄) 등을 급제(及第)시키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매듭을 묶어 글자를 대신하던 때로부터 이미 괘를 그려[畫卦] 이래 북극성같이 높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백성을 위해[南面]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 반드시 오상(五常)을 익혀 교화를 베풀고 6경(經)에 근거하여 법규를 취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순(舜)임금[有虞]은 상상(上庠)과 하상(下庠)을 열었고 하후씨(夏后氏)는 동서(東序)와 서서(西序)를 두었으며, 은(殷)은 국학(國學)과 태학(太學)을 정비하였고 주나라는 동교(東膠)와 우상(虞庠)을 세웠다. 선생을 택하여 토론하게 하고 국자(國子)들에 명하여 경험하고 익히게 하니,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알게 되었고 『예기(禮記)』·『악경(樂經)』·『시경(詩經)』·『서경(書經)』이 족히 군자의 경륜이 펼쳐지는 나라가 되었다. 인륜의 궤범(軌範)과 왕도의 기강(紀綱)이 밝아져 볼 만하게 되어 빛나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나의 도는 천명(天命)을 받기에 부끄럽고, 덕은 세상을 다스리기에 부족하지만 외람되게도 열성(列聖)의 위대한 왕업을 이어받아 삼한(三韓)의 왕업을 갑자기 차지하게 되니, 마음엔 두려움이 남아있고 생각하니 부지런함만이 절실하다. 바라건대 풍속으로 가벼워졌던 것을 바꾸어 사람들이 예의와 겸양을 알게 하고, 배움의 터전에는 공부하는[鼓篋] 무리가 늘어나 많아지며 쌀 창고와 곡식 노적가리에는 책 읽는 사람들로 빼곡히 차게 하려고 한다. 하물며 생명을 지키는 도리는 병을 고치는 것을 우선하니 그런 까닭에 신농씨(神農氏)가 세상을 다스리던 때에는 약초(藥草)를 갖추어 맛보았고, 진시황(秦始皇)은 모든 서적을 불태우면서도 의경(醫經)만은 없애지 않았다. 장차 백성의 어려움과 위급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완전한 의술을 널리 퍼트림이 중요하다. 요즈음 여러 주군현(州郡縣)의 자제(子弟)들을 널리 모아 개경(開京)에 와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더니, 과연 바람을 타듯이 부름에 응하여 이르러와 강의하는 곳 안에 학도들이 자못 많아졌다. 그들이 대부분 집을 떠나 먼 길을 와서 객이 된 지 오래되어 뜻은 산과 같이 게을러지고 도리어 마음은 흙을 품은 듯 깊어만 간다. 고향을 떠나 외로운 처지를 가엽게 여겨 유시(諭示)하는 말을 내리니, 머물기를 바라는 자는 뜻대로 개경에 머물고 물러가기를 구하는 자는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돌아감을 허락한다. 각자에게 내려줄 것이니 물러갈지 말지를 정하도록 하라. 그러나 두려운 것은 본성(本性)에 총명함이 있으면서도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 아직 한 경(經)의 뜻도 배우지 못하고 몇 년[數紀]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비록 앞길이 있다 하더라도 헛되이 쓰레기가 될 것이니 인재를 얻을 계책이 없는 터에 무엇을 말미암아 선비를 구할 수 있으랴? 이제 경서에 통달하고 책을 두루 읽은 선비와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무리들을 뽑아 12목(牧)에 각각 경학박사(經學博士) 1명과 의학박사(醫學博士) 1명을 차견(差遣)할 것이다. 부지런히 행하여 잘 이끌고 여러 학도들을 잘 교육시키면 반드시 그 공적의 깊고 옅음을 헤아려 순서를 뛰어넘어 관직에 발탁하는 영예로 장려할 것이다. 여러 주군현의 장리(長吏)나 백성들 가운데 가르치고 배울 만한 재주 있는 아이가 있는 자들은 이에 응해 마땅히 선생으로부터 열심히 수업을 받도록 가르치고 경계해야 한다. 만일 그 부모가 나라의 풍교(風敎)를 알지 못하고 가산(家産)을 경영(經營)하느라 다만 오늘 아침의 이익만 보고 다른 날의 영화를 생각하지 않은 채 이르기를, ‘배우고 익혀서 무엇을 하느냐? 책 읽는 것은 이로움이 없다.’고 하여 도리어 고생스레 공부[編柳]하는 것을 가로막고 오직 땔나무만 중요하다 한다면 그 자식은 이가 빠질 때까지 들을 수 없으며 그 부모 또한 영예로운 몸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영월(寗越)이 농사를 내던지고 공부해 귀함을 얻은 것과 광형(匡衡)이 벽을 뚫고 공부해 성공한 것, 혹은 주옹자(朱翁子)가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것,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초헌(軺軒)을 타고 촉(蜀)으로 돌아온 사례는 모두 뜻한 바의 학업에 부지런함으로써 영예로운 이름을 세운 것이니 이런 사람들을 말하고 생각하면 정말로 많이 아름답게 권장해야 하겠다. 아아! 품고 있는 재능과 안고 있는 그릇으로 임금을 섬김은 곧 충성의 시작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써 부모를 드러냄은 효의 끝이니 충효로 칭송받을 만하다면 총애와 영화를 어찌 아끼겠는가? 오늘 이후로부터 만약 어려운 중에서 공부[螢窓]에 힘쓰며 뜻을 두는 이, 학교[鱣肆]에서 경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이, 효도와 우애로 소문이 난 이, 의술이 쓸 만한 이가 있거든 해당 지역의 목재(牧宰)·지주(知州)·현관(縣官)들은 갖추어 기록하여 개경(京師)에 천거해 올리라.”라고 하였다.

9월 무진(戊辰). 모든 촌(村)의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고쳐 촌장(村長)과 촌정(村正)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팔관회(八關會)를 중지하라 명하였다.

이 해에 오부(五部) 방리(坊里)를 정하였다.

7년(988) 봄 2월 임자(壬子). 좌보궐(左補闕) 겸 지기거주(知起居注) 이양(李陽)이 봉사(封事)를 올리기를,
“첫째로, 옛날의 어진 선왕(先王)은 하늘의 도를 받들고 높여 역법(曆法)을 공경스럽게 받들었고, 임금이 농사일의 어려움과 힘듦을 하는 까닭에 백성들이 농사짓고 누에치는 시기의 늦고 빠른 바를 알게 되니, 이로써 가가호호마다 부유해졌으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월령(月令)」을 상고하면, ‘입춘(立春) 전에 토우(土牛)를 내어 농사짓는 시기를 보인다.’라고 하니, 고사(故事)를 들어 때에 맞게 행하기를 요청합니다. 둘째로, 적전(籍田)을 친히 경작함은 어진 임금께서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뜻이요, 여자가 할 일을 몸소 행함은 어진 후비(后妃)께서 군왕을 돕는 덕입니다. 하늘과 땅에 정성을 보이고 나라에 경사를 쌓는 까닭입니다. 『주례(周禮)』의 「내재직(內宰職)」을 상고하면, ‘이른 봄에 왕후에게 조(詔)를 내려 육궁(六宮)의 사람을 거느리고 늦벼와 올벼 종자를 싹틔워서 왕에게 바치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임금께서 하는 일을 왕후가 반드시 돕는다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이른 봄이니 풍년이 들기를 하늘에 빌고, 길한 날에 동교(東郊)에서 적전을 경작해야 합니다. 임금께서 비록 적전에서 일하시긴 하였으나 왕후께서 종자를 바치는 의례를 행하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주례(周禮)』에 의거하여 나라의 풍속을 옳게 밝히소서. 셋째로, 성인은 위와 아래를 잘 살핌으로써 시절의 변화에 통달하고 임금은 인정(仁政)을 행하고 은혜를 폄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에 이르게 합니다. 「월령(月令)」을 상고하면, ‘정월의 우수[雨水, 中氣] 이후에는 희생(犧牲)으로 암컷을 쓰지 말고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며, 어린 들짐승을 잡거나 알을 채취하지 말고 많은 사람을 모으지 말며 길에 드러난 해골을 묻어주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이제 새해의 처음에 두루 관리들이 봄에 각 고을을 돌아보게 하는 명령을 반포하여, 온 백성이 모두 이때에 금해야 할 일을 알고 더하여 마땅히 할 도리를 알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이양(李陽)이 논한 것은 모두 경전(經典)에 의거한 말이니 마땅히 윤허를 베풀겠다. 그 중 토우(土牛)를 내는 일은 올해 입춘이 이미 지났으니 내년 입춘 전을 취해 해당 관청[所司]에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도록 하라. 종자를 바치는 일은 마땅히 예관(禮官)에게 명령을 내려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적전(籍田)을 갈 날을 골라 아뢰면 왕과 왕후(王后)가 몸소 행할 것이니 올해부터 시작하고 이것을 통례(通例)로 삼을 것이다. 정월 우수[雨水, 中氣] 초에는 공사(公私)의 모든 제사 같으면 암컷을 희생(犧牲)으로 써서 삶을 해치지 말도록 하고,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여 만물이 자라나는 기운[盛德所在]을 범하지 말게 하라. 어린 짐승을 잡거나 알을 채취하지 말고 어린 싹을 다치게 하지 말 것이며, 도적을 방어하고 성벽을 쌓아 중요한 곳을 막는 일 이외에는 많은 사람을 모아 농사를 막지 말도록 하라. 가축이건 사람이건 마른 뼈나 썩은 살이 햇빛에 드러나 있으면 모두 가리고 묻어주게 함으로써 죽은 기운이 산 기운을 거스르게 하지 말도록 하라. 아아! 하늘에는 네 계절이 있어 봄에는 따뜻하고 조화로운 덕을 펴며, 임금은 오교(五敎)를 행함에 있어 인(仁)을 예(禮)나 의(義)보다 우선으로 삼는다. 마땅히 옛 성인이 정한 법도를 따름으로써 목신(木神)이 만물을 창조하는 뜻을 좇으며, 드디어 날짐승과 물고기로 하여금 그 본성(本性)을 따르게 하고 풀과 나무도 은혜를 입게 하며 심지어 마르고 썩은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나서 자라는 은혜를 짊어지게 한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모든 관청과 12목(牧)의 지주현(知州縣)·진사(鎭使) 등에게 반포하여 모두 나의 맡긴 바를 알게 하며 조제(條制)를 힘써 행하게 하라. 마땅히 나의 뜻을 체득(體得)하여 널리 백성[黎元]에게 보여 이 명령을 어기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가을 9월 신축(辛丑). 이위(李偉)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겨울 10월 송(宋)에서 은청광록대부 상서예부시랑 상주국(銀靑光祿大夫 尙書禮部侍郞 上柱國) 여단(呂端)과 은청광록대부 행좌간의 상주국(銀靑光祿大夫 行左諫議 上柱國) 여우지(呂祐之)를 보내, 왕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하여 책봉(冊封)하고 식읍(食邑) 1,000호와 식실봉(食實封) 500호를 더하였다. 충대순군사 지절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상주국 고려국왕(充大順軍使 持節玄菟州諸軍事 玄菟州都督 上柱國 高麗國王)은 이전에 의거하고 산관훈(散官勳)도 예전과 같이하였다.

이 해 정월에 송(宋) 황제가 적전(籍田)을 친히 경작하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고쳐 단공(端拱)이라 하고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에게 아울러 은전(恩典)을 더하였다. 그리고 여단(呂端) 등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고 인하여 사면의 뜻을 알렸다. 왕이 이미 책봉을 받았으므로 교형(絞刑)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문반(文班)으로서 벼슬길에 나선 해가 오래 된 자들은 복색(服色)을 고쳐 입게 하고, 무반(武班)으로서 나이가 많고 자손이 없는 자와 계묘년(癸卯年, 943)부터 군적(軍籍)에 적힌 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양반(兩班)이 모두 은전을 입게 하였다.

12월 을축(乙丑). 초하루 불교법[浮屠法]에 의거하여 정월·5월·9월을 삼장월(三長月)로 삼아 도살(屠殺)을 금지하였다.

이 해에 처음으로 5묘(廟)를 정하였다.

최승로(崔承老)를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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