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光宗)

 

광종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光宗 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의 휘는 소(昭)이고 자는 일화(日華)이며 정종(定宗)의 친아우이다. 태조(太祖) 8년(925) 을유(乙酉)에 태어났고, 정종(定宗) 4년(949) 3월 병진(丙辰)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가을 8월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 등에게 명하여 정국(定國) 초기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상고하고, 네 번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쌀 25석을, 세 번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20석을, 두 번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15석을, 한번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12석을 하사하도록 하여 이것을 예식(例食)으로 삼았다.

원년(950) 봄 정월 큰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히자 왕이 재앙을 물리치는 술법을 물었다. 사천감(司天監)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로부터 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었다.

연호(年號)를 ‘광덕(光德)’이라 정하였다.

2년(951)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성의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또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돌아가신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처음으로 후주(後周)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3년(952) 후주(後周)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봉(徐逢)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4년(953) 후주(後周)에서 위위경(衛尉卿) 왕연(王演)과 장작소감(將作少監) 여계빈(呂繼贇)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여, 특진 검교태보 사지절현도주도독 충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 檢校大保 使持節玄菟州都督 充大義軍使 兼 御史大夫 高麗國王)으로 삼았다.

5년(954) 봄 왕이 숭선사(崇善寺)를 창건(創建)하여 돌아가신 모후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6년(955) 후주(後周)에 대상(大相) 왕융(王融)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광평시랑(廣評侍郞) 순질(荀質)을 후주(後周)에 보내 즉위를 하례하였다.

7년(956) 후주(後周)에서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내 왕을 가책(加冊)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로 삼고, 아울러 백관(百官)의 의관제도(衣冠制度)는 중국(華)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전 대리평사(大理評使) 쌍기(雙冀)가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왔다.

8년(957) 봄 정월 왕이 구정(毬庭)에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9년(958) 여름 5월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정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雙冀)에게 명하여 진사(進士)를 뽑았다.

병신(丙申).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 방목(榜目)을 붙이고, 최섬(崔暹) 등을 급제시켰다.

이 해에 후주(後周)에서 상서수부원외랑(尙書水部員外郞) 한언경(韓彦卿)과 상련봉어(尙輦奉御) 김언영(金彦英)을 보내 비단[帛] 수천 필을 가지고 와 동(銅)으로 바꾸어갔다.

10년(959) 봄 후주(後周)에 좌승(佐丞) 왕긍(王兢)과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을 보내 명마(名馬)와 직조(織造)하여 만든 웃옷, 활과 칼 등을 바쳤다.

가을 후주(後周)에 사신(使臣)을 보내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권, 『황령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웅도(孝經雌雄圖)』 3권을 바쳤다. 후주(後周)에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대교(戴交)를 보냈다.

겨울 후주(後周)에 사신(使臣)을 보내 구리(銅) 50,000근과 자수정(紫水晶)‧백수정(白水晶) 각 2,000개를 바쳤다. 후주(後周)의 시어(侍御) 쌍철(雙哲)이 오자 좌승(左丞)에 임명하였다.

11년(960) 봄 3월 갑인(甲寅) 최광범(崔光範) 등을 급제시켰다.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하였다. 개경(開京)을 고쳐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삼았다.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반역(叛逆)을 꾀한다고 참소(讒訴)하자 이들을 내쫓았다. 이로부터 참소(讒訴)하고 아첨하는 이들이 뜻을 얻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였다.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讒訴)하니, 감옥[囹圄]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假獄]을 두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시기함이 날로 심해져 왕실 종족(宗族)도 많이 보호받지 못하였으며, 비록 왕의 외아들 왕주(王伷)라도 의심을 받아 왕을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사람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마주보고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12년(961) 궁궐(宮闕)을 수리하자, 왕이 정광(正匡) 왕육(王育)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거(王擧) 등을 급제시켰다.

13년(962) 겨울 송(宋)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4년(963) 여름 6월 왕이 궁궐로 돌아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내(朕)가 요즈음 궁궐[大內]의 중수(重修)를 위해 오랫동안 이궁(離宮)에 있었으므로, 경비(警備)에 마음을 두고 보통 때와는 일처리도 달라 백관(百官)이 아뢰는 일을 직접 듣지 못한 적이 많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 마음에 혹 의심이 생겨 막히게 될까 우려하여, 이것이 걱정거리가 되고 잠자고 먹을 때에도 잊지 못하였다. 이제 궁궐 수리를 마치고 정사(政事)를 처리할 장소도 있으므로, 무릇 너희 백관(百官)은 각각 너희의 일을 공경하고 옛 일에 의거하여 보고를 올리며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같이 즐겨[魚水同歡] 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이가 멀어지는 데 이르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귀법사(歸法寺)를 창건(創建)하였다.

겨울 12월 송(宋)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송(宋)에서 책명사(冊命使) 시찬(時贊)을 파견하였는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90인이나 되었고 시찬(時贊)만 홀로 면하였으므로 왕이 특히 그를 두텁게 위로하였다.

15년(964) 봄 3월 김책(金策) 등을 급제(及第)시키고,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김책(金策)에게 잔치에 참석할 것을 명하였다.

가을 8월 임자(壬子).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16년(965) 봄 2월 왕의 아들 왕주(王伷)에게 관례[元服]를 행한 후 왕태자 내사제군사 내의령 정윤(王太子 內史諸軍事 內議令 正胤)으로 세우고, 여러 신하들에게 장생전(長生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송(宋)에 대승 내봉령(大丞 內奉令) 왕로(王輅)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송(宋) 황제가 왕로(王輅)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임명하고 식실봉(食實封) 300호와 아울러 관고(官誥)를 하사하였다.

가을 7월 병오(丙午).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이 죽었다.

17년(966) 최거업(崔居業)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19년(968) 홍화사(弘化寺)·유암사(遊巖寺)·삼귀사(三歸寺) 등을 창건(創建)하였다.

승려(僧) 혜거(惠居)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坦文)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왕이 참소(讒訴)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속으로는 스스로 회의(懷疑)하여 죄악을 씻어보고자 재회(齋會)를 널리 베풀었다. 무뢰배(無賴輩)가 거짓으로 출가(出家)하여 배를 불리고자 하였고 구걸하는 자들도 줄지어 모여들었다. 가끔 떡과 쌀, 콩과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생(放生)하는 곳을 많이 설치하고 근처 사원(寺院)에 나아가 불경(佛經)을 강연(講演)하게 하였으며 도살(屠殺)을 금하였으므로, 왕의 반찬으로 쓸 고기[肉饍]도 시전(市廛)에서 사다가 올렸다.

20년(969) 겨울 11월 왕의 아우 왕욱(王旭)이 죽었다.

21년(970) 왕이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였다.

22년(971) 겨울 12월 임인(壬寅)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23년(972) 봄 2월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가을 8월 사면령을 내렸다.

이 해에 양연(楊演) 등을 급제시켰다.

송(宋)에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황제가 왕에게 제서(制書)를 내려 식읍(食邑)을 더하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서희(徐熙)에게는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부사(副使)인 내봉경(內奉卿) 최업(崔業)에게는 검교사농경 겸 어사대부(檢校司農卿 兼 御史大夫)를, 판관(判官)인 광평시랑(廣評侍郞) 강례(康禮)에게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녹사(錄事)인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금부낭중(檢校尙書金部郞中)을 내리고 아울러 관고(官誥)도 하사하였다.

24년(973) 봄 2월 백사유(白思柔) 등을 급제시켰다.

25년(974) 봄 3월 한인경(韓藺卿) 등을 급제시켰다.

이 해에 서경(西京)의 거사(居士) 연가(緣可)가 반역(叛逆)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승려(僧) 혜거(惠居)가 죽자 탄문(坦文)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26년(975) 여름 5월 왕이 편찮아 갑오(甲午)에 정침(正寢)에서 훙서(薨)하니, 왕위에 있은 지 26년이며 나이는 51세였다. 왕이 즉위한 처음에는 신하를 예절로 대우하고 정사 처리에 밝았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선비들을 존중하였다.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니 거의 치평(治平)에 이르렀다. 중반 이후로는 참소(讒訴)를 믿어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지나치게 불법(佛法)을 믿었으며 절제함이 없이 사치하였다. 시호(諡號)를 일러 대성(大成)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였으며, 송악산(松嶽山)의 북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憲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선열(宣烈)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평세(平世)를 더하였으며, 18년(1027)에 숙헌(肅憲)을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의효(懿孝)를 덧붙였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 강혜(康惠)를 더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기를,
“광종(光宗)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을 ‘현인(賢人)을 쓰는 데 기준이 없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쌍기(雙冀)가 과연 현인(賢人)이었다면 어찌 임금을 착한 데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며, 참소(讒訴)를 믿어 형벌을 남용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지 못하였는가?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것 같은 것을 보면 광종(光宗)의 바름[雅]이 있었고, 문(文)으로 풍속(風俗)을 교화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쌍기(雙冀)가 장차 그의 뜻을 따라 그 아름다운 일을 이루었으니 보탬이 없었다고 이를 수는 없다. 오직 겉치레에 흐른 문장[浮華之文]만을 부르짖었으니 후세에 끼친 폐해를 다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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