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군(劍君)
검군(劍君)은 구문(仇文) 대사(大舍)의 아들이다.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丁亥,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을 죽였다.
다음 해(628)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이때에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劍君)만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舍人)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홀로 그것을 물리치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만약 양이 적어서 불만이라면 다시 더 주겠다.”라고 말하였다. 검군(劍君)은 웃으면서 “저는 근랑(近郞)의 무리에 이름을 걸어 두고 풍월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대일(大日) 이찬(伊湌)의 아들이 화랑(花郎)이 되어 근랑(近郞)이라고 불렀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검군(劍君)이 나와 근랑(近郞)의 집에 이르렀다. 사인(舍人)들은 비밀리에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누설될 것이라고 의논하고서는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劍君)은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근랑(近郞)에게 작별하며 “오늘 이후에는 다시 만날 수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근랑(近郞)이 그에게 물었으나 검군(劍君)은 말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으니 이에 그 연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近郞)이 “어찌 담당 관리에게 알리지 않는가?”라고 하니 검군(劍君)은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라고 하니 “저들이 그르고, 제가 옳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한다면 장부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갔다.
여러 사인(舍人)들이 술자리를 차려 놓고 용서를 빌면서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다. 검군(劍君)이 알고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검군(劍君)은 죽어야 할 데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泰山)을 기러기 털(鴻毛)보다 가볍게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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