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甄萱) 신검(神劍) 용검(龍劍) 양검(良劍) 금강(金剛) 영규(英規)

 

견훤(甄萱)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사람이다. 본래의 성(夲姓)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자기 힘으로 살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将軍)이 되었다.

처음 견훤(甄萱)이 태어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숲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虎)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에서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생김이 뛰어났으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평범하지 않았다. 군대를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다. 서남 해안에 가서 국경을 지켰는데,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그의 용기는 항상 군사들 중 첫째였다. 노고로 비장(裨)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892)은 신라(新羅) 진성왕(真聖王) 재위 6년인데, 왕의 총애를 받는 아이들이 곁에 있으면서 정권을 훔쳐 제 마음대로 휘두르니 기강이 문란해졌다. 그에 더하여 기근(饑饉)이 드니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떼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甄萱)은 몰래 넘겨다보는 마음을 갖고, 무리를 불러 모아 왕경의 서남쪽 주·현(州縣)을 돌아다니며 공격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이때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이 강성하여 궁예(弓裔)가 스스로 투탁하여 휘하가 되었는데, 견훤(甄萱)이 이를 듣고 멀리 양길(良吉)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甄萱)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견훤(甄萱)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三國)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韓)변한(韓)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당(唐)나라 고종(高宗)이 신라(新羅)의 요청으로 장군(将軍)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新羅)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百濟)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의자왕(義慈)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후백제왕(後百濟)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니 이때는 (唐)나라 광화(光化) 3년(900)이며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이었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오월왕(吳越王)이 답례의 사신을 보냈다. 이에 검교태보(檢校太保)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천복(天復) 원년(901)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開平) 4년(910) 견훤(甄萱)금성(錦城)궁예(弓裔)에게 투항한 것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써 그곳을 포위 공격하여 10일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乾化) 2년(912)에 견훤(甄萱)궁예(弓裔)덕진포(德津浦)에서 싸웠다.

정명(貞明) 4년(918) 무인(戊寅) 철원경(鐡圎京)의 민심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즉위시켰다.

견훤(甄萱)이 이를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一吉湌) 민합(閔郃)을 보내 축하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또 사신을 오월(吳越)에 보내 말을 바치도록 하니, 오월(吳越王)이 답례의 사신을 보냈다.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주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6년(920)에 견훤(甄萱)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라 왕(新羅王)이 아찬(阿湌)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태조(太祖)가 군대를 출동시켰다. 견훤(甄萱)이 이를 듣고 물러났다. 견훤(甄萱)은 우리태조(太祖)와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동광(同光) 2년(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성(大耶城)과 문소성(聞韶城)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성 사람들이 태조(太祖)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또 싸웠으므로 수미강(須彌强)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太祖)에게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驄馬)을 바쳤다.

3년(925) 겨울 10월에 견훤(甄萱)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에 이르니 태조(太祖)또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더불어 겨루었다. 그때 견훤(甄萱)의 군사가 매우 날래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太祖)는 임시방편으로 화친하여 그 군사를 피곤하게 하려고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냈다. 견훤(甄萱)도 또한 인질로 사위(外甥) 진호(虎)를 보냈다.

12월에 거창(居昌) 등 2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사신을 후당(後唐)에 보내 제후국을 칭하도록 하였다. 후당(後唐)에서 책명하여 검교태위(檢校太尉) 겸(兼) 시중(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를 주고, 전례대로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 백제왕(百濟王) 식읍 이천오백 호(食邑二千五百戸)로 하였다.

4년(926)에 진호(虎)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甄萱)은 이를 듣고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곧바로 왕신(王信)을 감옥에 가두었다. 또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낸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驄馬)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태조(太祖)가 웃으며 그것을 돌려 보냈다.

천성(天成) 2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그를 불태웠다. 진격하여 신라(新羅)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였다. 신라(新羅) 근교에 닥치니 신라 왕(新羅王)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태조(太祖)가 군사를 출동시켜 도와주려고 하였는데, 견훤(甄萱)이 갑자기 신라(新羅) 왕도(王都)에 들어갔다. 그때 왕은 부인과 후궁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놀면서 술자리를 벌여 즐기고 있었는데, 적병(賊兵)이 이르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인과 함께 성 남쪽의 별궁으로 돌아왔고, 여러 시종(侍從)하던 신료(臣寮)들과 궁녀(宫女) 및 악사(伶官)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다. 견훤(甄萱)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오게 하여 앞에 이르자 그를 죽였다. 곧 궁중(宫中)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부인을 강제로 끌어내 능욕하였다. 왕의 집안 동생 김부(金傅)로 하여금 이어서 왕이 되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동생(王弟) 효렴(孝廉)과 재상(宰相)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고, 또 국가 창고(國帑)의 진귀한 보물(珍寳)과 병장기(兵仗)를 빼앗고, 자녀들과 온갖 장인 중 솜씨가 있는 자들은 스스로 따르게 하여 돌아갔다.

태조(太祖)는 정예의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甄萱)공산(公山)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크게 싸웠다. 태조(太祖)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太祖)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훤(甄萱)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거란(契丹)의 사신 사고(裟姑), 마돌(麻咄) 등 35명이 예물을 갖고 왔다. 견훤(甄萱)이 장군(将軍) 최견(崔堅)을 시켜 마돌(麻咄) 등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항해(航海)하여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唐)나라 등주(登州)에 도착하여 모두 형벌을 입어 죽음을 당했다.

당시 신라(新羅)의 임금과 신하들은 쇠퇴하여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우리태조(太祖)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견훤(甄萱)은 자기가 나라를 빼앗을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먼저 할까 걱정하여 이런 까닭으로 군대를 이끌고 왕도(王都)에 들어가 나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12월 어느 날에 태조(太祖)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았다. “지난 번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도록 하려고 한 것은 마치 작은 자라(鼈)가 큰 자라(黿)의 울음에 응답하는 것 같고, 이는 종달새(鷃)가 송골매의 날개(隼翼)를 걸치려고 한 것이니, 반드시 산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폐허로 만들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까닭으로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둘렀습니다. 모든 신료들에게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였고, 6부(部)를 바른 가르침으로써 타일렀는데, 뜻밖에 간신들은 달아나 숨고, 임금께서 돌아가시는 변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表弟)이고, 헌강왕(獻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권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위태로운 나라를 구원하고, 임금을 잃었으나 임금을 세운 일이 이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헤아리지 않고 단지 떠도는 말만 듣고, 온갖 계책으로 엿보며 다방면에 걸쳐 침입하여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오히려 저의 말머리(馬首)를 볼 수 없었고, 저의 소 털(牛毛)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군진 아래에서 손이 묶였고, 한 달이 되지 않아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理寺) 앞에서 시체를 드러냈으며, 죽인 자도 많고, 추격하여 사로잡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는 바는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패강(浿江, 대동강)의 물가에서 말을 물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前月) 7일에 오월국(吳越囯)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오월(吳越王)의 조서를 전하였습니다. ‘경(卿)은 고려(髙麗)와 오래토록 우호를 통하였고, 함께 이웃으로 동맹을 약속한 줄 알고 있었는데, 근래 인질(因質)들이 서로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和親)의 옛 우호를 잃고 서로 영토를 침략하여 전쟁을 쉬지 않으니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 경(卿)의 본국에 가도록 하고, 또 고려(髙麗)에도 서신을 보냈다. 마땅히 각기 서로 친하게 지내 영원히 전쟁을 그치도록 하라.’

저의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돈독하고, 마음은 큰 나라를 섬기는데 깊습니다. 조서를 듣고 곧 공손히 받들려고 합니다. 다만 그대가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서를 베끼어 보내드리니 청컨대 유의하여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獹)가 번갈아 피곤해지면 마침내 반드시 비웃음을 받을 것이고, 큰 조개(蚌)와 도요새(鷸)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도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음을 교훈으로 삼아 후회(後悔)를 스스로 남기지 말도록 하십시오.”

3년(928) 정월에 태조(太祖)가 답서를 보냈다.

“엎드려 오월국(吳越囯)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바의 조서 한 통을 받들었고, 아울러 그대가 수고롭게 보내준 긴 편지에 사실을 적은 것을 받았습니다. 삼가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사신이 조서를 전하니 흰 비단에 쓴 좋은 소식를 받고 보니 비록 감격을 더하였으나 그대의 편지를 뜯어보니 혐의를 풀기 어렵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수레 편에 문득 제 마음을 알리려고 합니다.

저는 위로는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將帥)의 권한을 맡고,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번에 3한(三韓)이 재앙을 당하고, 9주(九土)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도적(黃巾)에 속하였고, 농토가 붉은 땅(赤土)이 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쟁의 난리를 막기를 바라고 나라의 재난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하여 이에 스스로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어느덧 우호관계를 맺으니 과연 수천리에 걸쳐 농상의 생업을 즐겨하고, 7~8년간 사졸들이 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을유(乙酉, 925)에 이르러 때는 10월에 갑자기 일을 일으켜 교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대는 처음 적을 가볍게 보고 곧바로 전진하였으니 마치 버마재비(螳蜋)가 수레를 막는 것과 같았고, 마침내는 어려운 줄을 알고 용감히 퇴각하였으니 마치 모기(蚊子)가 산을 등진 것과 같았습니다. 공손히 손을 맞잡고 말하기를 하늘을 두고 맹서하여 오늘 후에는 영원토록 화목할 것이며 만약 혹 맹서를 깨뜨린다면 신이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창을 멈추게 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바랬습니다. 드디어 겹겹으로 포위한 것을 풀어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을 사양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제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입니다.

어찌 맹서하면서 바른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 벌과 전갈(蜂蠆)의 독이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며, 이리와 호랑이(狼虎)의 사나움이 서울 부근(畿甸)을 막아 금성(金城)이 곤궁하여 망할 지경에 이르고, 어가(黄屋)가 놀라게 될 줄이야 생각하였겠습니까? 의리를 지켜 (周)나라를 높임에 있어 누가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패업(覇)과 비슷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漢)나라를 도모함에 있어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지존한 왕으로 하여금 굽혀서 그대에게 자식이라 칭하게 하여 높고 낮은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걱정하였습니다. 재상이 충직하고 참되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였는데, 제가 마음에 악함을 숨기지 않았고, 뜻이 왕을 높임에 간절하다고 하여서 장차 조정에 있으면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도록 한 것입니다.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서는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 질렀으며, 대신들을 살육하였고, 선비와 백성을 죽였습니다. 귀부인은 곧 붙잡아 곧 빼앗아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은 곧 빼앗아 가득 실어 갔습니다. 큰 죄악은 걸왕(桀旺), 주왕(紂王) 왕보다 더하고, 불인함은 제 아비를 잡아먹는 사나운 짐승보다 심합니다. 저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짐에 극에 달했고, 정성은 해를 물러나게 할 정도로 깊어 매(鷹鸇)가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犬馬)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서약했습니다.

다시 방패와 창(干戈)을 든 후 두 번 느티나무와 버드나무(槐柳)가 바뀌었습니다. 육지의 공격에서는 우뢰같이 달리고 번개 같이 공격하였고, 수전의 공격에서는 호랑이(虎)처럼 치고 용(龍)처럼 날랐습니다. 움직였다 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행하였다 하면 목적을 이루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해안에서 윤빈(尹邠)을 쫓을 때에는 쌓인 갑옷이 산 같았고, 성 언저리에서 추조(鄒造)를 사로잡을 때에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습니다. 연산군(燕山郡) 근처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진 앞에서 목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언저리에서는 수오(隨䎸)를 군기 아래에서 죽였습니다. 임존성(任存)을 쳐서 빼앗던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이 몸을 버렸고, 청주(清川)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直心) 등 네다섯 명이 머리를 바쳤습니다.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바라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에서는 입에 구슬을 물고(銜璧) 투항하였습니다. 강주(康州)는 남쪽에서 와서 귀부하였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옮겨 속했습니다. 침범하고 공격함이 이와 같으니 잃었던 땅을 되찾을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沚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가 천 갈래 원한을 씻었듯이, 오강(烏江)가에서 한왕(漢王)이 한 번 이겨 공을 이루었듯이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영원히 천하를 맑게 하기를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吳越) 전하(殿下)의 덕이 두루 미쳐 먼 곳까지 포용하며, 어짊이 깊어 작은 나라를 어루만져 특별히 궁성(丹禁)에서 말씀을 내시어 청구(靑丘)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이미 본보기가 되는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감히 좇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공경스럽게 황제의 뜻을 받들어 모두 흉함과 거짓을 그친다면 상국(上囯)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해동(海東)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잘못이 있는데도 고칠 수 없다면 만약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여름 5월에 견훤(甄萱)이 몰래 군사를 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여 3백여 인을 살해하였다. 장군(將軍) 유문(有文)이 항복하였다.

가을 8월에 견훤(甄萱)이 장군(將軍)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명지성(命旨城) 장군(將軍)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그를 공격하게 하니 물러나 대야성(大耶城)을 지켰다.

겨울 11월에 견훤(甄萱)이 굳센 군사를 뽑아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지키던 군사 1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장군(將軍) 양지(楊志)와 명식(明式) 등이 항복하였다.

4년(929) 가을 7월에 견훤(甄萱)이 군사 5천 명으로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니 성주(城主) 장군(將軍)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太祖)가 통곡하면서 “나는 좌우의 손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병산(瓶山) 아래에 가서 태조(太祖)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전사자가 8천여 명이었다.

다음날 견훤(甄萱)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장군(將軍) 원봉(元逢)은 방어할 수 없자 성을 버리고 밤에 달아났다. 견훤(甄萱)이 백성들을 잡아 전주(全州)로 옮겼다. 태조(太祖)원봉(元逢)이 이전에 공(功)을 세웠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고, 순주(順州)를 개칭하여 하지현(下枝縣)으로 불렀다.

장흥(長興) 3년(932) 견훤(甄萱)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견훤(甄萱)공직(龔直)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 넓적다리 근육을 불로 지져 끊어 버렸다.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은 일길찬(一吉湌) 상귀(相貴)로 하여금 수군(舡兵)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3일을 머물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정주(貞州) 3주(州)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그것들을 불태우고, 저산도(猪山島)에 기르는 말 3백 필을 잡아서 돌아왔다.

청태(淸泰) 원년(934) 봄 정월 견훤(甄萱)태조(太祖)운주(運州)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군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르렀다.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이 그들이 미처 진을 치지 않았는데 굳센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3천 명을 베어 죽였다.

웅진(熊津) 이북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甄萱)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醫師) 훈겸(訓謙), 용감한 장수(勇將)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등이 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견훤(甄萱)은 많이 아내를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은 몸이 크고 지략이 많았다. 견훤(甄萱)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그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서 걱정하고 번민하였다.

당시 양검(良劒)강주(康州) 도독(都督)이었고, 용검(龍劒)무주(武州) 도독(都督)이었으며, 신검(神劒)만이 왕의 옆에 있었다. 이찬(伊湌)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康州), 무주(武州)에 보내 양검(良劒) 등과 더불어 몰래 모의하였다.

청태(淸泰) 2년(935) 봄 3월에 이르러 파진찬(波珍湌) 신덕(新德)·영순(英順) 등이 신검(神劒)에게 권하여 견훤(甄萱)금산불사(金山佛宇)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金剛)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신검(神劒)이 대왕(大王)을 자칭하였다.

국내에 크게 사면하였는데, 그 교서(敎書)는 다음과 같다.

여의(如意)가 특별히 총애(寵愛)를 입었으나 혜제(惠帝)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元良)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일어나 즉위하였으니, 천명(天命)은 바뀌는 법이 없고 왕위(神器)는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왕(大王)의 신과 같은 무예는 매우 출중하였으며, 영특한 계책은 만고에 으뜸이었다. 쇠퇴한 말기에 태어나 천하를 다스릴 것을 자임하여 삼한(三韓) 땅을 복종시켜 백제국(百濟)을 부흥하였다. 도탄(塗炭)의 고통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고, 격려하여 기세를 돋우기를 바람과 천둥처럼 하니 멀리와 가까이에서 준걸들이 달려와 큰 공이 거의 다시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지혜롭고 사려가 깊었으나 갑자기 한 번 실수하여 어린 아들을 편애하고, 간신(姦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니 대왕(大君)(晉)나라 혜제(惠帝)의 어리석음으로 인도하였고, 어진 아버지를 헌공(獻公)의 의혹에 빠지게 하여 왕위를 어리석은 아이에게 줄 뻔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제(上帝)께서 진정한 마음을 내리시니 군자가 허물을 바로 잡고 맏아들인 나에게 명하여 이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점이다.

돌아다보건대 위엄을 떨칠 만한 재목이 아니니 어찌 임금 자리에 앉을 만한 지혜가 있겠는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마치 얼음이 언 연못을 밟는 듯하다.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생각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고 하니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청태(清泰) 2년(935) 10월 17일 새벽 이전의 이미 발각된 일이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일, 이미 결정된 것이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나 사형(大辟) 이하의 모든 죄는 사면하니 맡은 자는 시행하라.”

견훤(甄萱)이 금산사(金山)에 있은 지 3개월만인 6월에 막내 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총애하는 첩 고비(姑比) 등과 더불어 금성(錦城)으로 도주하여 사람을 보내 태조(太祖)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 만세(萬歲) 등을 보내 수로(水路)를 경유하여 가서 그를 위로하여 따라오도록 하였다.

도착하자 두터운 예로써 대접하였다. 견훤(甄萱)이 10년 연장자라고 하여 높여서 상보(尙父)로 삼았다. 남쪽 궁궐(南宫)을 머물 곳으로 주었으며, 지위는 백관(百官)의 위에 두었다. 양주(楊州)를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고 겸하여 금과 비단(金帛), 병풍과 금침(蕃縟), 노(奴)와 비(婢) 각각 40구, 내구마(內廏馬) 10필을 주었다.

견훤(甄萱)의 사위(壻) 장군(將軍) 영규(英規)가 그의 부인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대왕(大王)께서 부지런히 힘쓴 지 40여 년에 큰 공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들의 화로 인하여 설 땅을 잃고 고려(髙麗)에 투항하였습니다. 대저 정조가 있는 여자(夫貞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不事二夫),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主)고 하였습니다. 만약 자기의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들을 보겠습니까? 하물며 듣자니 고려(髙麗)의 왕공(王公)께서는 마음이 어질고 후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하니 대개 하늘이 계시인 듯합니다. 반드시 삼한(三韓)의 주인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왕을 문안, 위로하고 겸하여 왕공(王公)에게 겸손하고 정중함을 보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내가 “그대의 말이 곧 내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936) 2월에 사람을 보내 뜻을 전달하였는데, 드디어 태조(太祖)에게 고하기를 “만약 정의로운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대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신에게 후하게 물건을 주어 보내고, 겸하여 영규(英規)에게 사례하여 말하였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쳐져서 길의 막힘이 없어진다면 먼저 장군(將軍)을 찾아 인사드리고 그런 후에 마루에 올라 부인에게 절하고, 형처럼 섬기고 누나처럼 받들겠으며 반드시 끝내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름 6월에 견훤(甄萱)이 아뢰었다. “늙은 신하가 전하(殿下)에게 몸을 의탁하였던 까닭은 전하(殿下)의 존엄한 위세를 빌려 반역한 자식을 베기를 원해서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大王)께서 신령스러운 군사를 빌려 주셔서 그 난신적자를 없애 주신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太祖)가 이를 따랐다. 먼저 태자(太子) (武)와 장군(將軍) 술희(述希)를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에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太祖)가 삼군(三軍)을 이끌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一善)에 나아갔다. 신검(神劒)이 군사로 그를 막았다.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맞서 진을 쳤다. 태조(太祖)는 상보(尙父) 견훤(甄萱)과 함께 열병하였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將軍)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이 되었다. 대상(大相) 김철(金鐵), 홍유(洪儒), 수향(守鄕), 장군(將軍) 왕순(王順), 준량(俊良) 등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이 되었다. 대광(大匡) 순식(順式), 대상(大相) 긍준(兢俊), 왕겸(王謙), 왕예(王乂), 금필(黔弼), 장군(將軍) 정순(貞順), 종희(宗熙) 등은 철기(鐵騎) 2만, 보병 3천 및 흑수(黑水), 철리(鐵利) 등 여러 도(道)의 날랜 기병 9천 5백 명을 인솔하여 중군(中軍)이 되었다. 대장군(大將軍) 공훤(公萱), 장군(將軍) 왕함윤(王含允)은 군사 1만 5천 명을 인솔하여 선봉(先鋒)이 되었다. 북을 치며 행진하였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효봉(孝奉), 덕술(德述), 명길(明吉) 등이 군세가 대단하고 정비된 것을 바라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진 앞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태조(太祖)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百濟) 장수(將帥)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孝奉) 등이 말하기를 “원수(元帥) 신검(神劒)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는 장군(將軍) 공훤(公萱)에게 명하여 곧바로 중군(中軍)을 공격하게 하고, 전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협공하니 백제군(百濟軍)이 패하여 무너졌다.

신검(神劒) 및 두 동생과 장군(將軍) 부달(富達), 소달(小達), 능환(能奐) 등 40여 인이 항복하였다. 태조(太祖)는 항복을 받고 능환(能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은 위로하고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능환(能奐)에게 묻기를 “처음 양검(良劒) 등과 몰래 모의할 때 대왕(大王)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우자고 한 것은 너의 꾀였다. 신하된 의리로 이와 같음이 옳은가?”라고 하였다. 능환(能奐)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그를 베었다.

신검(神劒)이 분수에 넘치게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은 남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고 또 귀순하여 죄 주실 것을 빌었으므로 특별히 그 죽을 죄를 용서하였다. 또는 3형제 모두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甄萱)은 근심하고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黄山)의 절에서 죽었다.

태조(太祖)가 군령을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사졸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州)와 현(州)은 안도하였고, 노인과 어린이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군과 군졸(將士)들을 찾아가 사정을 알아보고,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니 백성들도 저마다 그 직업을 편안히 하였다.

신검(神劒)의 죄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이에 관위(官位)를 하사하였다. 그 두 동생은 능환(能奐)과 죄가 같으므로 드디어 진주(州)에 유배하였다가 곧 그들을 죽였다.

영규(英規)에게 이르기를 “앞의 임금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신하들로서 한 사람도 위로하고 돕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그대의 부부가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전하였고, 겸하여 나에게 미덕을 돌리니 그 의로움은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좌승(左丞) 벼슬을 주고 토지 1천 경(頃)을 하사하였다. 역마(驛馬) 25필을 내어주어 집안사람들을 맞이하게 하였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하사하였다.

견훤(甄萱)당()나라 경복(景福) 원년(892)에 나라를 일으켜 후진(後晉) 천복(天福) 원년(936)에 이르렀으니 모두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논(論)하여 말한다.

신라(新羅)는 운수가 다하고 도가 사라져 하늘이 돕는 바가 없고 백성이 돌아갈 바가 없었다. 이에 떼도적들이 틈을 타서 일어났는데, 마치 고슴도치 털(猬毛) 같았다. 그중에 심한 자는 궁예(弓裔)견훤(甄萱)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弓裔)는 본래 신라(新羅)의 왕자(王子)였으나 도리어 종국(宗國)을 원수로 삼아 그를 멸망시키려고 하여 선조(先祖)의 화상(畫像)을 칼로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甄萱)은 신라(新羅)의 백성에서 일어나 신라(新羅)의 관록을 먹었으면서도 반역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수도를 침범하여 임금과 신하(君臣)를 도륙하기를 마치 새를 잡 듯이, 풀을 베듯이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 였다. 그러므로 궁예(弓裔)는 그 신하들로부터 버림받았고, 견훤(甄萱)은 자기 자식에게서 재앙을 입었던 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니 또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漢)나라와 (唐)나라의 일어남을 대적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궁예(弓裔)견훤(甄萱)과 같은 흉악한 사람들이 어찌 우리태조(太祖)와 서로 겨룰 수 있겠는가? 단지 그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준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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