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문(蓋蘇文)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헌성(獻誠)
개소문(蓋蘇文) 혹은 개금(蓋金)의 성(姓)은 천씨(泉氏)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하였다.
외모가 웅장하면서 기품이 있었고, 적극적이고 호방(豪逸)하였다.
그 아버지 동부(東部) 혹은 서부(西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蓋蘇文)은 마땅히 그 지위를 계승하고자 하였지만, 국인(國人)은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그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개소문(蓋蘇文)은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였고,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부탁하였으며, 잘못된 점이 있으면 비록 쫓아내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를 애처롭게 여기고, 마침내 지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흉악하고 잔인하였으며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여러 대인(大人)과 왕은 몰래 죽이고자 논의하였는데, 일이 새어나갔다. 개소문(蓋蘇文)은 부병(部兵)을 모두 모아놓고, 마치 군대를 사열할 것처럼 꾸몄다. 이와 함께 성 남쪽에다가 술과 안주를 성대히 차려 두고,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모두 살해하니, 모두 1백여 명이었다.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잘라 여러 토막으로 내고 도랑에 버렸다.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王)으로 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唐)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의 역할과 같다. 이에 전국을 호령하였고,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매우 위엄이 있었는데, 몸에는 5도(五刁)를 찼으며, 주위에서 함부로 올려볼 수 없었다. 매번 말을 타고 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 출신의 무장(貴人武將)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를 발판으로 하였다. 밖에 나가 다닐 적에는 반드시 군대의 행렬을 펼쳤는데, 앞서 인도하는 자가 길게 소리치면,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기를 구덩이나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唐) 태종(太宗)은 개소문(蓋蘇文)이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은 스스로 큰 죄를 저지른 줄 알고 있으니, 대국(大國)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그 나라에 수비를 세워두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잠시 마음을 감추고 참으십시오. 저들은 스스로 안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더욱 그 나쁜 짓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한 이후에 개소문(蓋蘇文)을 멸망시키시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이를 따랐다.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었다.
“중국(中國)에는 3교(三敎)가 나란히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도교(道敎)가 아직까지 없습니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구해오도록 하소서!” 왕이 드디어 표(表)를 보내 청하니, 당(唐)나라에서는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의 사람을 보냈고, 이와 함께 《도덕경(道德經)》을 주었다. 이에 불교의 사찰을 가져다 그들의 숙소로 삼았다.
마침 신라(新羅)의 사신이 당(唐)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뢰기를
“백제(百濟)가 우리 40여 성을 공격해 빼앗았고, 다시 고구려(髙句麗)와 연합하여 입조(入朝)의 길을 막으려고 모의하고 있으니, 저희들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자의 군대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명하여 새서(璽書)를 주며, 다음과 같이 왕을 타일렀다.
“신라(新羅)는 예를 다하여 충성을 다짐한 나라로 조공(朝貢)을 빠뜨린 적이 없다. 너희는 백제(百濟)와 함께 마땅히 각기 전쟁을 멈추기 바란다. 만약 다시 신라(新羅)를 공격한다면, 내년에는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토벌할 것이다.”
처음 현장(玄獎)이 국경에 들어갔을 때, 개소문(蓋蘇文)은 이미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新羅)를 공격하고 있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개소문(蓋蘇文)을 부르자, 이에 돌아왔다. 현장(玄獎)이 조서를 보여주니, 개소문(蓋蘇文)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날 수(隋)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新羅)가 이를 틈타 우리 성읍(城邑) 5백 리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로부터 원한이 생기고 사이가 멀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를 침략해서 빼앗아 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현장(玄獎)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다시 끄집어서 논의하고자 하십니까! 지금 요동(遼東)은 본래는 모두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이었습니다. 중국(中國)도 오히려 말하고 있지 않은데, 고구려(髙句麗)는 어째서 반드시 옛 땅을 찾고자 하십니까?” 개소문(蓋蘇文)은 따르지 않았다.
현장(玄獎)이 돌아가 그 일을 모두 말하니, 태종(太宗)은
“개소문(蓋蘇文)은 그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 나라의 대신(大臣)을 죽였으며, 그 나라의 백성에게 잔인하고 포학하다. 지금 또한 나의 명령에 어긋나고 있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사신 장엄(蔣儼)을 보내 황제의 조서를 전했지만, 개소문(蓋蘇文)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를 갖고 사신을 위협하였고, 사신이 굽히지 않자, 마침내 사신을 굴실(窟室)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太宗)은 크게 군대를 일으켜 친히 정벌하였다. 사실(事實)은 고구려본기(髙句麗夲紀)에 기술되어 있다.
개소문(蓋蘇文)은 건봉(乾封) 원년(666)에 죽었다.
아들 남생(男生)의 자(字)는 원덕(元德)이다.
9세에 부친의 직임(職任)으로 인하여 선인(先人)이 되었고, 중리소형(中裏小兄)으로 승진하였는데, 당(唐)나라의 알자(謁者)와 같은 것이다. 또한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國政)을 맡았다. 대체로 사령(辭令)은 모두 남생(男生)이 주관하였다.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승진하였고, 오래 있다가 막리지(莫離支)가 되었고, 이와 함께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였다. 더하여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나가서 여러 부(部)를 살펴보았는데,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국사(國事)를 맡았다.
어떤 이가
“남생(男生)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한다고 미워하여 장차 제거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은 이를 믿지 않았다. 또한 남생(男生)에게
“장차 그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남생(男生)이 첩자를 보내 가도록 하였는데, 남건(男建)이 첩자를 체포하였고, 곧바로 왕명(王命)이라고 속이며 남생(男生)을 불렀다. 남생(男生)은 두려워 감히 들어가지 못하니, 남건(男建)은 남생(男生)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였다.
남생(男生)은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지키면서 그 무리를 이끌고 거란(契丹)·말갈(靺鞨)의 군사와 함께 당(唐)나라에 투항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서 원통함을 호소하니, 고종(高宗)은 헌성(獻誠)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고, 수레와 말(輿馬), 고급 비단(瑞錦) 및 보도(寶刀)를 하사하고, 돌아가 보고하도록 하였다.
조서를 내려 글필하력(契苾何力)에게 병력을 이끌고 남생(男生)을 구원해 주도록 하였다. 남생(男生)은 이에 면할 수 있었다.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壌道行軍大摠管) 겸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를 주니, 가물(哥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에서 성(城)을 들어 항복하였다. 황제는 또한 서대사인(西臺舍人) 이건역(李虔繹)에게 명하여 군대에 나가 위로하도록 하였고, 도포(袍)·띠(帶)·금(金)·그릇 등의 7가지 물건을 내려 주었다.
다음해 남생(男生)을 불러 입조(入朝)하도록 하였고,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현도군공(玄菟郡公)으로 관작을 옮겨주고, 서울에 집 한 채를 주었다.
조칙으로 군대로 돌아가서 이적(李勣)과 함께 평양(平壤)을 공격해 들어가 왕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아들을 보내 고구려(髙句麗) 지역으로 가도록 하여 위로하고 선물을 내려 주었다. 돌아오니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변국공(卞國公)으로 승진시켰다.
나이 46세에 죽었다(卒).
남생(男生)은 순박하고 후덕하였으며, 예의가 있었다. 아뢰고 대답할 때 민첩하게 말을 잘 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왔을 때 엎드려 도끼로 처벌을 기다렸으니, 세상에서 이를 두고 칭찬하였다.
헌성(獻誠)은 천수(天授, 691~692) 연간에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우림위(羽林衛)가 되었다.
무후(武后)가 일찍이 금과 예물을 내어 문무관료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5명을 선발하여 적중하는 자에게 이를 주고자 하였다.
내사(內史) 장관보(張光輔)가 헌성(獻誠)에게 먼저 쏘기를 양보하여 첫 번째 순서가 되었다. 헌성(獻誠)이 이어 우왕검위대장군(右王鈐衛大將軍) 설토마지(薛吐摩支)에게 양보했고, 마지(摩支)는 다시 헌성(獻誠)에게 양보하였다.
조금 지나서 헌성(獻誠)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활을 잘 쏘는 자를 선발하셨지만, 중국인(華人)이 아닌 자가 많습니다. 저는 당(唐)나라 관인이 활쏘기를 수치로 여길까 걱정됩니다. 활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후(武后)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내준신(來俊臣)은 일찍이 재화를 요구하였는데, 헌성(獻誠)은 주지 않았다. 이에 헌성(獻誠)에게 모반(謀叛)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목매어 죽도록 하였다.
무후(武后)가 나중에 헌성(獻誠)의 원통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追贈)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를 지냈다.
받들지 못하였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스스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으니, 대역죄(大逆罪)를 짓기에 이르렀다. 《춘추(春秋)》에서는
“임금을 시해한 적(賊)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나라
논(論)하여 말한다. 송(宋)나라 신종(神宗)은 왕개보(王介甫)와 정사(政事)를 논의하며,
“태종(太宗)은 고구려(髙句麗)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기지 못했는가?”고 하였다. 왕개보(王介甫)는
“개소문(蓋蘇文)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개소문(蓋蘇文)은 또한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른 도리로 나라를 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개소문(蓋蘇文)은 몸을 보존하여 집에서 죽을 수 있었으니, 운 좋게 면한 자였다고 할 수 있다. 남생(男生)·헌성(獻誠)은 비록 당(唐) 황실에서는 명성이 있었지만,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 이들을 말하자면, 반역자(叛人)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0권(卷第五十) 열전(列傳) 견훤(甄萱) 신검(神劍) 용검(龍劍) 양검(良劍) 금강(金剛) 영규(英規) (0) | 2020.06.30 |
---|---|
제50권(卷第五十) 열전(列傳) 궁예(弓裔) (0) | 2020.06.29 |
제49권(卷第四十九) 열전(列傳) 창조리(倉助利) (0) | 2020.06.27 |
제48권(卷第四十八) 열전(列傳) 도미(都彌) (0) | 2020.06.26 |
제48권(卷第四十八) 열전(列傳) 설씨녀(薛氏女) (0) | 2020.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