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권(卷第五十)
열전(列傳) 제십(第十)
궁예(弓裔)·견훤(甄萱) 신검(神劍) 용검(龍劍) 양검(良劍) 금강(金剛) 영규(英規)
궁예(弓裔)
궁예(弓裔)는 신라(新羅) 사람으로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憲安王)의 후궁(嬪御)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마치 긴 무지개가 위로 하늘에 이어진 것 같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으며, 또 광염(光熖)이 이상하였습니다. 아마도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그를 키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포대기(襁褓)에서 빼앗아 그를 다락 아래로 던졌다.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그를 받았는데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 되었는데, 유희(遊戱)를 그치지 않았다. 그 여자 종이 그에게 일러 말하였다. “그대는 태어나면서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그냥 두기 어려워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와 그대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궁예(弓裔)가 울면서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세달사(世達寺)에 갔다.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법호를 지었다.
나이가 들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헌칠하고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齋)에 참석하려고 가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었던 물건을 들고 있는 바리때(鉢) 안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점대(牙籖)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비밀로 하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新羅)가 쇠약하여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주현(州縣)들로 배반하여 적에게 붙은 것과 서로 반반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떼를 이룬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善宗)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진성왕(真聖王)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신해(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箕萱)이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善宗)은 속이 답답하고 스스로 불안해져서 몰래 기훤(箕萱)의 휘하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결연하여 친구가 되었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년(892)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양길(梁吉)이 그를 잘 대우하여 일을 맡겼다.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나가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현(縣)을 돌아다니면서 습격하여 모두 그곳들을 항복시켰다.
건녕(乾寧) 원년(894)에 명주(溟州)에 들어갔다.
거느린 무리 3천 5백 명을 나누어 14개 부대로 하고, 금대(金大), 검모(黔毛), 흔장(盺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으로 삼았다. 사상(舍上)은 부장(部長)을 말한다.
사졸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 어려움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고, 상벌에 있어서 공정히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로써 뭇 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将軍)으로 삼았다.
이에 저족(猪足), 성천(狌川), 부약(夫若), 금성(金城), 철원(鐵圓) 등의 성을 격파하니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패서(浿西)의 도적들 중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선종(善宗)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무리가 많아졌으므로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하고, 처음으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으로부터 와서 의탁하니 곧 철원군태수(鐡圎郡太守)를 주었다.
3년 병진(896)에 승령현(僧嶺縣)과 임강현(臨江縣) 두 현(縣)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4년 정사(897)에 인물현(仁物縣)이 항복하였다.
선종(善宗)은 송악군(松岳郡)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郡)으로 산수(山水)가 기이하고 빼어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정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공암(孔巖)과 검포(黔浦), 혈구(穴口) 등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그때 양길(梁吉)은 여전히 북원(北原)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등 30여 성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종(善宗)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한 군사로써 그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선종(善宗)이 몰래 알고서 먼저 공격하여 그를 크게 패배시켰다.
광화(光化) 원년 무오(898) 봄 2월에 송악성(松岳城)을 수리하였다.
우리 태조(太祖)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㑹)를 개설하였다.
3년 경신(900) 또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 또는 청천(靑川), 괴양(槐壤)을 치게 하여 그곳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공(㓛)으로 태조(太祖)에게 아찬(阿飡)의 직위를 주었다.
천복(天復) 원년 신유(辛酉, 901)에 선종善宗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髙句麗)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平壌)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讎)를 갚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왕(新羅王)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다. 그 칼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천우(天祐) 원년 갑자(甲子, 904)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마진(摩震)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었는데 광치나(匡治奈) 지금의 시중(侍中), 서사(徐事) 지금의 시랑(侍郎), 외서(外書) 지금의 원외랑(貟外郎) 이다.
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 지금의 창부(倉部), 수춘부(壽春部) 지금의 예부(禮部), 봉빈부(奉賓部) 지금의 예빈성(禮賓省), 의형대(義刑臺) 지금의 형부(刑部), 납화부(納貨府) 지금의 대부시(大府寺), 조위부(調位府) 지금의 삼사(三司), 내봉성(內奉省) 지금의 도성(都省), 금서성(禁書省) 지금의 비서성(秘書省), 남상단(南廂壇) 지금의 장작감(將作監), 수단(水壇) 지금의 수부(水部), 원봉성(元鳳省) 지금의 한림원(翰林院), 비룡성(飛龍省) 지금의 태복시(太僕寺), 물장성(物藏省) 지금의 소부감(小府監)을 두었다.
또 사대(史臺) 여러 외국어 통역의 학습, 식화부(植貨府) 과일나무를 심고 기르는 일, 장선부(障繕部) 성과 해자의 수리, 주도성(珠淘省) 그릇을 만드는 일을 설치하였다.
또 정광(正匡)·원보(元輔)·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군윤(軍尹)·중윤(中尹) 등의 품직(品職)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청주(青州) 인호(人戸) 1천을 옮겨 철원성(鐡圎城)에 들이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尚州) 등 30여 주현(州縣)을 쳐서 가졌다.
공주장군(公州将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하였다.
천우(天祐) 2년 을축(乙丑, 905)에 새 서울에 들어갔다.
대궐(闕)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하게 하였다.
무태(武泰)를 성책(聖冊) 원년으로 고쳤다.
패서(浿西)를 13진(鎮)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壌城主) 장군(将軍)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황의(黃衣)의 도적 명귀(明貴) 등이 귀부하였다.
선종(善宗)은 강성해졌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였다. 병탄하려는 마음이 커서 국인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新羅)로부터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辛未. 911)에 성책(聖冊)을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하고, 국호(國號)를 고쳐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태조(太祖)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 등을 치도록 하고,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하였다. 공(㓛)을 논하여 태조(太祖)를 대아찬(大阿湌) 장군(将軍)으로 삼았다.
선종(善宗)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였다. 머리에는 금색 두건(金幘)을 쓰고 몸에는 가사(方袍)를 걸쳤다.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하였다.
외출하면 항상 흰 말(白馬)을 탔는데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다. 어린 남자아이(童男)와 어린 여자아이(童女)들로 하여금 깃발幡, 일산蓋, 향(香), 꽃(花)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고, 비구(比丘) 2백여 명을 시켜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妖妄)하여 모두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반듯하게 앉아 강설(講說)하였다.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악한 설(邪說)과 괴이한 말(恠談)로써 교훈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종(善宗)이 이를 듣고 노하여 철퇴(鐡椎)로 그를 때려 죽였다.
3년 계유(癸酉, 913)에 태조(太祖)를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4년 갑술(甲戌, 914)에 수덕만세(水徳萬歳)를 고쳐 정개(政開) 원년으로 하였다.
태조(太祖)를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정명(貞明) 원년(915)에 부인 강씨(夫人康氏)가 왕이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행하자 정색(正色)으로 간쟁(諌)하였다.
왕이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姧)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강씨(康氏)가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은 “나는 신통력으로 보았다.”라고 하였다.
뜨거운 불로 쇠 절구공이(鐡杵)를 달구어 그녀의 음부(隂)를 찔러 죽였고, 그 두 아이들도 죽였다.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급하게 내어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과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부양(斧壤), 철원(鐡圓) 사람들은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唐)나라로부터 와서 철원(鐡圎) 시장의 가게에 우거하였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918)에 이르러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였고, 귀밑털과 머리카락은 모두 희었으며, 옛 의관을 착용하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고 오른 손에는 옛 거울을 들고 있었다. 창근(昌瑾)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창근(昌瑾)이 곧 쌀을 주어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에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창근(昌瑾)이 그 거울을 벽 위에 걸어두었는데, 해가 거울 표면에 비치자 가는 글자로 쓴 글 있었다. 그것을 읽어보니 옛 시 같았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니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움켜쥘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二龍)이 나타나 한 마리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숨기고 한 마리는 모습을 흑금(黑金)의 동쪽에 드러낼 것이다.”
창근(昌瑾)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서는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창근(昌瑾)과 더불어 그 거울의 주인을 찾도록 하였는데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발삽사(㪍颯寺) 불당(佛堂)에 진성(鎮星)의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그 사람 같았을 뿐이다.
왕이 한참 동안 이상함을 탄식하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그를 해석하도록 하였다.
함홍(含弘) 등이 서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말한다. 두 마리 용(二龍)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감추고, 하나는 모습을 흑금(黑金)에 드러낸다고 한 구절에서 푸른 나무(靑木)는 송(松)이고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 용(龍)자를 이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자손이니 지금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을 말함일 것이다. 검은 쇠(黒金)는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䥫圎)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움켜쥔다(操鷄後搏鴨)는 것은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후에 압록(鴨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함홍(宋含弘)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잔학하고 난폭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만일 이를 사실대로 아뢰었다가는 비단 우리들만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만 아니라 파진찬(波珍湌)도 또한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하고는 이에 듣기 좋게 꾸며서 아뢰었다. 왕이 흉악하고 잔학하여 자기 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렵고 떨려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름 6월 장군(将軍)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능산(三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棐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젊을 때 이름인데,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에 태조(太祖)의 사저(私第)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主上)이 부당한 형벌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처자를 살륙하고 신료를 죽이며, 백성은 도탄에 빠져 스스로 삶을 편안히 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키고 지혜가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청컨대 공(公)께서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십시오.”
태조(太祖)는 불쾌한 얼굴빛으로 그를 거절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충직하다고 자부하여 왔는데 지금 비록 포악하고 난폭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은 이를 혁명(革命)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으니 감히 은(殷)나라, 주(周)나라의 일을 본받을 수가 있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습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모두 그 임금을 밉게 보기를 원수 같이 합니다. 지금 덕망(徳望)이 공(公)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王昌瑾)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물러나 숨어 있다가 포악한 군주(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부인 유씨(夫人柳氏)가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이에 태조(太祖)에게 말하였다. “인(仁)으로써 불인(不仁)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여 왔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발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大丈夫)께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뭇 사람들의 마음이 문득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太祖)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太祖)를 호위하고 문을 나섰다. 앞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왕공(王公)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고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와 따르는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또 먼저 궁성(宫城)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들이 또한 1만여 명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미천한 차림으로 산림(山林)에 달아나 들어갔다가 곧 부양(斧壌)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弓裔)는 당(唐)나라 대순(大順) 2년(891)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貞明) 4년(918)에 이르렀으니 무릇 28년 만에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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