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도(驟徒) 부과(夫果) 핍실(逼實)

 

취도(驟徒)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기록에는 그의 성이 전하지 않는다. 형제는 셋으로 맏이는 부과(夫果)이고, 가운데는 취도(驟徒),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취도(驟徒)는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을 도옥(道玉)이라 하였고, 실제사(實際寺)에 머물렀다.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百濟)가 조천성(助川城)쳐들어오자, 대왕(大王)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도옥(道玉)이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려(僧)가 된 자는 ‘위로는 학술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음은 도(道)의 쓰임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모습만 승려와 비슷할 뿐이고 한 가지 좋은 것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차라리 종군(從軍)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승복(法衣)을 벗어 던지고, 군복(戎服)을 입고 이름을 고쳐 취도(驟徒)라고 하였다. 달려가서 보병(徒)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병부(兵部)에 나아가서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旗皷)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槍劒)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賊)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그 후 함형(咸亨) 2년 신미(辛未, 671)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百濟) 변방의 벼(禾)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백제인(百濟人)웅진(熊津)의 남쪽에서 싸웠다. 그때 부과(夫果)가 당주(幢主)로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논공(論功) 서열이 제일 높았다.

문명(文明) 원년 갑신(甲申, 684)에 고구려(髙句麗)의 남은 적이 보덕성(報德城)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치도록 하였는데, 핍실(逼實)을 귀당(貴幢)의 제감(弟監)으로 삼았다.

출전에 임하여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에 죽어 이름을 길이 남겼소. 나는 비록 어질지 못하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겠는가? 오늘 그대와 살아서 헤어지지만, 끝내는 사별할 것이오. 상심하지 말고 잘 있으시오.”라고 하였다. 적진과 맞섬에 미치자, 홀로 나가 용감히 싸워 수십 명을 목 베어 죽이고 죽었다.

대왕(大王)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취도(驟徒)는 죽을 곳을 알았고 형과 동생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부과(夫果)핍실(逼實) 또한 의리에 용감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장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모두에게 사찬(沙湌)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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