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素那) 심나(沈那)

 

소나(素那) 혹은 금천(金川)은 백성군(白城郡)사산(蛇山)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심나(沈那) 혹은 식천(熄川)은 팔 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었고 몸이 가볍고도 민첩하였다. 사산(蛇山)의 경계가 백제(百濟)와 서로 뒤섞이어 엇갈려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침입과 공격이 없는 달이 없었다. 심나(沈那)가 전쟁에 나갈 때마다 대적할 수 있는 강한 군사가 없었다.

인평(仁平) 연간(634~637)에 백성군(白城郡)에서 군사를 내어 가서 백제(百濟)의 변방 고을을 빼앗았는데, 백제(百濟)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급히 신라(新羅)군을 치니, 우리 군사들이 어지럽게 물러났다. 심나(沈那)만이 홀로 칼을 빼들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수십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적(賊)이 두려워하여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백제인(百濟人)이 심나(沈那)를 가리켜서

“신라(新羅)의 날으는 장수”라 말하였다. 인하여 서로 이르기를

심나(沈那)가 아직 살아 있으니, 백성(白城)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소나(素那)의 용맹스럽고 뛰어남은 아버지의 풍채를 닮았다. 백제(百濟)가 멸망한 후에, 한주(漢州) 도독(都督) 도유공(都儒公)에게 청하여 소나(素那)를 아달성(阿達城)으로 옮기어 북쪽 변방을 막도록 하였다.

상원(上元) 2년 을해(乙亥, 675) 봄에 아달성(阿達城) 태수(太守) 급찬(級湌) 한선(漢宣)이 백성들에게 어떤 날에 모두 나가 삼(麻)을 심도록 명을 내리고, 또 이 명을 절대로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말갈(靺鞨)의 첩자(諜者)가 이것을 알고 돌아가 자기 추장(酋長)에게 보고하였다. 그날에 이르러 백성이 모두 성을 나가 밭에 있었다. 말갈(靺鞨)이 군사를 숨겼다가 갑자기 성에 들어가 온 성을 노략질하니, 노인과 어린아이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소나(素那)가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하여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은 신라(新羅)심나(沈那)의 아들 소나(素那)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고자 도모하지 않을 것이니,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어찌 나오지 않느냐!”고 하였다. 마침내 분노하여 적에게 돌진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하여 화살을 쏠 뿐이었다. 소나(素那) 또한 화살을 쏘니, 날으는 화살이 벌떼와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우니, 소나(素那)의 몸에 박힌 화살이 고슴도치(猬) 같았다. 마침내 꺼꾸러져서 죽었다.

소나(素那)의 아내는 가림군(加林郡)의 양가집(良家) 딸이다. 이전에 소나(素那)는 아달성(阿逹城)이 적국(敵國)에 가까웠으므로 홀로 갔고, 그 아내는 집에 남았다.

군(郡) 사람들이 소나(素那)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조문하니, 그 아내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나의 남편(吾夫)은 항상 말하기를 ‘장부(丈夫)는 진실로 마땅히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의 죽음은 그 뜻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대왕(大王)이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아버지와 아들(父子)이 나라의 일에 용감하였으니,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고 말하고 잡찬(迊湌)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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