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世家) 권제17(卷第十) 고려사17(高麗史十)

 

인종3(仁宗三) 17년

 

〈기미〉 17년(1139) 봄 정월 무자. 금(金)에서 고주관내관찰사(高州管內觀察使) 야율영(耶律寧)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임진. 금(金) 사신을 위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을미.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하였다.

2월 무오. 대사면을 하는 제서(制書)에 말하기를,
“짐이 선군(先君)의 마지막 명을 받들어 누대의 큰 왕업을 계승했지만 덕은 부족하고 임무는 중하여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권신(權臣)의 발호로 재화(灾禍)를 초래하여 병오(丙午, 인종 4, 1126) 2월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신령한 성조(聖祖)를 모신 사당과 조종의 신어(神御) 및 정전인 노침(路寢)과 궁중 부고(府庫)까지 불에 모두 타버려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짐이 세상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부끄럽고 두려워 편안히 지낼 겨를도 없었는데, 이제 천지의 음덕과 신민의 협력으로 궁궐 중수(重修)의 공이 마무리되어 지난 무오(戊午, 인종 16, 1138) 겨울 10월 궁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막대한 경사라 할 수 있다.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하고 널리 그 은택을 베풀고자 중외에 포고하노니 〈사형인〉 대벽(大辟) 이하에 해당하는 형을 받은 죄수들은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경오. 대관전(大觀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병자.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3월 갑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이 사망하였다.

신묘. 〈왕이〉 나가서 흥왕사(興王寺) 천복원(薦福院)에 거둥하였다.

계사.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을사. 김부식(金富軾)과 최진(崔溱) 등을 불러 술자리를 열고는 김부식으로 하여금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유표(遺表)」와 「훈검문(訓儉文)」을 읽게 하였다.

여름 4월 정묘. 서리가 내렸다.

기사. 우박이 쏟아졌다.

경오.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5월 갑신. 왕이 경령전(景靈殿)에 배알하였다.

갑오. 왕이 친히 궐정(闕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병신.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을사. 우박이 쏟아졌다.

병오.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6월 경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갑인. 최급(崔伋) 등에게 급제를 내렸다.

계해. 왕이 명인전(明仁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무진.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가을 8월 신해. 〈폐비되어〉 쫓겨난 왕비 이씨가 사망하였다.

신유.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가 구요당(九曜堂)에 갔다.

경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9월 임오. 지후(祗侯) 최사영(崔思永)을 사신으로 금(金) 동경(東京)에 보냈다.

갑신.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겨울 10월 경신. 명인전(明仁殿)에서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기사.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였다.

을해. 선경전(宣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3일간 열고, 30,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11월 경진. 좌상시(左常侍) 강영준(康英俊) 등이 상소하여 10여 조목에 걸쳐 정사를 논하였다.

임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진관(陳灌)을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계미. 왕이 기로(耆老) 및 효자와 순손(順孫), 절부(節婦)와 의부(義夫), 독질(篤疾)·폐질자(癈疾者)에게 친히 음식을 대접하였다.

갑오. 상의봉어(尙衣奉御) 최시윤(崔時允)을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경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왕정표(王正彪)를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다.

신축. 김약온(金若溫)을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예부사(守太傅 門下侍中 判戶禮部事)로 삼고 이어 치사(致仕)하도록 하였다.

갑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치사(致仕)한 김극검(金克儉)이 사망하였다.

12월 병진.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정사. 명인전(明仁殿)에서 4일간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신미. 임원애(任元敱)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최진(崔溱)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지저(李之氐)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왕충(王冲)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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