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례복(단령)
유물관
유물관
남이흥 장군 유물
남이흥 장군 일가 유물
급제 교지
단서함
지휘봉
남여
궁대
광대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국가민속문화유산21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 1576∼1627)은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전사한 남유(南瑜)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조 35년(1602)에 무과에 급제 하고, 이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유품에는 사슴의 가죽으로 만들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옷 1벌과 많이 훼손되어 형태를 분별하기 어렵지만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그에게 인조(仁祖)가 친히 입었던 것을 벗어 주었다고 전하는 곤룡포(袞龍袍) 1벌, 그리고 상아·나무·녹각 등으로 만든 장군 가족들의 호패(號牌) 7점이다. 이 외에도 고서(古書), 서한(書翰), 영정(影幀), 교지(敎旨), 의류(衣類) 등 보존되고 있는 500여 점의 그의 유품들은 17세기 초의 생활상과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군의 유품 중 녹구(鹿裘)는 인조(仁祖)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안주(安州)에 있을 때 호신용(護身用)으로 입던 것이고, 곤룡포(袞龍袍)는 정묘호란시 안주성에서 남이흥(南以興) 장군 전사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임금은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 하고 장례시, 장례에 참여하여 눈물을 흘리며애도하며 인조(仁祖) 임금이 입었던 곤룡포(袞龍袍)를 친히 벗어 장군의 관(棺)위에 덮어 준것이라고 한다.
※명칭변경; 남이흥 장군 유품 → 남이흥 장군 일가유품
구의(상)
구의(하)
구의(녹피)
구의(상,하) 국가민속문화유산21-1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구의(裘衣)란 사슴가죽으로 만들어 방탄용으로 입던 옷으로 인조 5년(1627) 병자호란 때 호신용으로 입었다. 상의 앞쪽은 매듭으로 5개의 단추를 만들어 여밀 수 있으며, 깃은 사각이지만 목 둘레는 둥글다. 상의(上衣) 길이 141㎝, 뒤품 61㎝이며, 하의(下衣)는 지금의 한복 바지와 같은 모습으로 길이 114㎝, 허리둘레 66㎝이다.
보수전
보수후
답호(보수후 - 세부)
답호 국가민속문화유산21-2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답호(褡穫)는 조선시대 왕과 문무관리들이 철릭 위에 입었던 소매없는 겉옷을 말한다. 이 유물은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유품 중 하나로 인조의 하사품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형태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호패 국가민속문화유산21-3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왕족으로부터 양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호구파악, 유민방지, 신분질서 확립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신분에 따라 재료와 기재내용, 새겨진 위치 등이 달랐다. 이 유물은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호패(號牌)로 1개가 남아있다.
가족호패 국가민속문화유산21-4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왕족으로부터 양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호구파악, 유민방지, 신분질서 확립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신분에 따라 재료와 기재내용, 새겨진 위치 등이 달랐다. 이 유물은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가족 호패(號牌)로 6개가 남아있다.
급제 교지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1602년(만력 30년) 충의위(忠義衛) 남이흥(南以興)이 무과 병과제5인으로 급제하였음을 알려주는 급제교지이다.
교서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이흥(南以興)이 안주목사 겸 방어사로 재임할 때에 내려진 교서로 포승상(褒陞賞)교서로 칭해진다.
진무공신 교서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남이흥(南以興)에게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의 훈록이 가해진 공신교서이다. 이 공신교서는 현존하는 남이흥(南以興)의 유품과 유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 영정을 그려 하사한 것과 함께 반당 10명, 노비 13구, 구사 7명, 토지 150결, 은 10량, 표리 1단, 내구마 1필 등을 하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교서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인조가 특별히 남이흥(南以興)에게 노비를 상으로 하사하는 교지이다.
추증 교지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안주에서 남이흥(南以興)이 순절한 직후 내려지는 추증교지로, 증직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의춘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이다. 교지 년기 뒤에 전몰인을 포상하라는 전교에 따른 것이라는 주기가 있다.
교서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인조가 순절한 진무원일등공신 남이흥(南以興)에게 특별히 노비를 하사하는 교서이다.
교서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인조가 순절한 남이흥(南以興)에게 특별히 노비를 하사하는 교서이다.
별급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응룡(南應龍, 남이흥의 조부)의 처 정씨가 아들 남유(南瑜)에게 노비와 전답을 별급하는 내용으로, 증인 7명의 착서명과 수결이 있다.
별급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응룡(南應龍)의 처 정씨가 차자 남유(南瑜)의 과거 급제 기념으로 노비 4구를 하사한 별급문서로 증인 2명과 필집 1명의 착서명과 수결이 있다.
화회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응룡(南應龍)의 두 아들 남황(南璜), 남유(南瑜)의 미망인들인 홍씨와 유씨가 화회하여 전답과 노비를 나눈 문기로, 별좌댁, 목사댁, 봉사조로 3구분되어 있다. 필집으로 남두극(南斗極)이 착서명하고 있다.
화회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유(南瑜, 남이흥의 부)의 처 유씨가 친정에서 분재받은 재산을 기록한 문서로 이 문서는 1591년에 분재한 재산이 임진왜란으로 분산되자 당초의 분재문기를 모아 다시 3자매가 화회 분재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남유(南瑜)의 처 유씨의 몫으로는 노비 26구, 전답은 목천 등지의 것(수량 불명)과 양주답 등 10두락이다.
별급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유(南瑜, 남이흥의 부)의 처 유씨가 아들 연안부사 남이흥(南以興)에게 전답을 별급하는 문서이다.
허여문기 국가민속문화유산21-5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유(南瑜)의 처 유씨가 장손 남두극(南斗極)에게 연안소재 전답과 노비를 허여하는 문서로 증인과 필집의 수결이 있다.
남이흥 장군 영정 국가민속문화유산21-6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당진시 충장사에 소장된 이 초상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현존상태가 양호한 남이흥(南以興)의 공신도상(功臣圖像)이다. 이 초상은 보수를 했으나 옛 표구와 술 까지 견지하고 있으며, 말아두었을 때 꺾인 부분들과 안면의 찢긴 부분이 있으나 화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단서함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귀중문서보관함인 단서함은 먹감나무 바탕 판재위에 장방형의 사각틀을 짜 올린 후 미닫이식 뚜껑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함이 여닫이식임에 비해 함의 위쪽에 홈을 파고 못을 사용하지 않은 접착면을 접착제인 어교를 사용한 연귀 맞춤질로 처리하였다. 습도나 열에 약한 단점이 있으나 장식이 없어 간결하게 보이며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질감이 뛰어난 숙련된 장인의 작품이다.
지휘봉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등책(藤策)·등편(藤鞭)으로 부르기도 하는 지휘봉은 군이나 관료들의 지휘봉 또는 채찍으로 사용되었던 장신구의 일종이며 때로 호신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엄지손가락 정도 되는 길이의 대나무를 손잡이 부분과 끝부분에 골무형의 주석장식을 박아 마감하고 20cm크기의 붉은 헝겊을 달아 장식하였으며, 그 반대쪽에는 녹피(鹿皮)로 꼰 끈을 촘촘히 동여매 터짐을 방지하였다. 지휘봉의 몸통에는 염색기법의 하나인 점반죽법의 섬세하고 유연한 필력의 목리(木裏)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화살통과 화살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화살통은 화살을 담았던 대나무통으로 크기에 비해 촘촘한 대나무를 사용하여 깨지거나 터지는 것을 막았다. 마디와 마디 사이를 구분지어 대나무와 모란문양을 빈틈없이 빽빽하게 낙(烙)을 놓았다. 특히 마디부분은 연속된 파도문과 같은 굵은 띠를 새겨 마치 책판의 변(邊)문양을 연상케 한다.
남여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남여(藍輿)는 위를 덮지 않은 뚜껑이 없는 의자와 비슷한 작은 승교(乘轎)로 산길 등 좁은 길을 다닐 때 사용하던 가마의 일종이다. 장방형의 4각 틀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사개 물림하여 튼튼하게 세워 동자 사이에 2단의 머름판을 두르고 난간을 돌렸다. 목재의 연결부위는 자형의 거멀장식으로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요여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요여(腰輿)는 장사를 지낸 뒤 신주(神主)와 혼백(魂帛)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가마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영여(靈輿)라 부르기도 한다. 사각의 견고한 바탕틀 위에 가로 세로 동자를 세워 2단의 머름판을 두르고 4면에는 여닫이 투각 연속 삼각형 문양 창문을 낸 후 상단부에 다시 머름판을 돌려 지붕으로 연결시켰다. 옥개형의 처마를 두른 안쪽에 궁륭천장을 설치하여 사람이 타고 다니는 가마의 축소판을 만들었다.
충정공 내외관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일반적인 장례에서는 홀관을 사용하였으나 사대부 등 지체 높은 부자집이나 효심이 지극한 자손들은 망자의 시신이 빨리 썩지 않고 관으로 침입하는 나무뿌리나 해충을 방지하기 위하여 겹관을 사용하였다. 관의 재료는 부분 파손 방지나 빨리 썩는 목심(木芯)이 보이는 나무는 피하고 공이가 없고 목리가 촘촘한 고급 재료를 사용하였다. 외관·내관 모두 관의 6면 두께가 일정하며 사개 짜임으로 못하용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매우 견고한 상태이다. 또 바닥 판재와 좌우벽 덛널판지, 천판의 이음 부분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은장(나비 날개형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보인다.
정경부인 정씨 내외관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일반적인 장례에서는 홀관을 사용하였으나 사대부 등 지체 높은 부자집이나 효심이 지극한 자손들은 망자의 시신이 빨리 썩지 않고 관으로 침입하는 나무뿌리나 해충을 방지하기 위하여 겹관을 사용하였다. 관의 재료는 부분 파손 방지나 빨리 썩는 목심(木芯)이 보이는 나무는 피하고 공이가 없고 목리가 촘촘한 고급 재료를 사용하였다. 외관·내관 모두 관의 6면 두께가 일정하며 사개 짜임으로 못하용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매우 견고한 상태이다. 또 바닥 판재와 좌우벽 덛널판지, 천판의 이음 부분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은장(나비 날개형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보인다.
궁대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활을 넣은 통으로 겉감은 녹색의 융(絨)이고, 안감은 가죽이며, 다양한 무늬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시복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화살을 꽂는 통으로 큰 것과 작은 것 2개가 연결된 형태이며, 재료나 제작기법, 장식기법이 궁대와 동일하다.
광대 국가민속문화유산21-7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조선후기 군복의 가슴 띠로 사용되던 것으로 요대(腰帶)라고도 하며, 아청색의 우단으로 제작되었다.
명주겹답호1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명주 겹 답호 2점 중 1점은 보수하여 파손된 부분을 보수한 상태이다. 2점 모두 반소매가 달린 포로 관복용 직령과 그 형태가 같으나 소매만 짧다. 답호는 철릭의 포제 위에 덧입어 통상 예복으로 착용되었다. 구성적 특징은 직령 깃이 달린 반소매 포로써 양 옆에 커다란 사다리꼴 무가 달려있다. 두 개의 답호 모두 13내지 14cm 나비의 칼깃으로 외깃 형태이며 전단후장형이고, 조선 전기 답호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답호는 소매가 없어지고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의 무가 두루마기와 같은 삼각형의 무와 같은 형으로 바뀌면서 뒤트임을 주어 전복의 형태와 흡사한 모양으로 변화된다.
명주겹답호2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명주 겹 답호 2점 중 1점은 보수하여 파손된 부분을 보수한 상태이다. 2점 모두 반소매가 달린 포로 관복용 직령과 그 형태가 같으나 소매만 짧다. 답호는 철릭의 포제 위에 덧입어 통상 예복으로 착용되었다. 구성적 특징은 직령 깃이 달린 반소매 포로써 양 옆에 커다란 사다리꼴 무가 달려있다. 두 개의 답호 모두 13내지 14cm 나비의 칼깃으로 외깃 형태이며 전단후장형이고, 조선 전기 답호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답호는 소매가 없어지고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의 무가 두루마기와 같은 삼각형의 무와 같은 형으로 바뀌면서 뒤트임을 주어 전복의 형태와 흡사한 모양으로 변화된다.
명주겹철릭1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포제로 치마폭을 넓게 만들어 마상의(馬上衣)로 적합하여 왕 이하 백관들이 원행시 융복(戎服)으로 착용하였으며, 조선 전기 출토 복식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철릭은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에 변화를 뚜렷하게 보이는 복식이다. 전기의 철릭은 상의와 하상의 비율이 대략 1:1 정도이며 퉁수형의 소매가 달린다. 그 중에는 반소매로 제작하고 긴 소매를 따로 만들어 연봉 단추로 연결하여 착용하는 탈착식의 소매가 많이 발견된다. 복식 유물 중 철릭 3점은 모두 조선 전기의 특징을 보인다. 깃은 이중깃 또는 외깃의 칼깃 형태이며, 상의와 하상이 모두 1:1 비율에 가깝고, 상의 폭은 13내지 14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치마 주름도 0.2cm내외의 잔주름이 잡힌 매우 정교한 바느질 상태를 보여준다. 겨드랑이에 사각 접은 무가 달리고 고름 바대를 대고 직접 붙이는 쌍고름이 달려 있으며, 소매는 모두 탈착 소매가 있는 형태이나 1점만 분리 소매가 남아있다. 2점은 매듭의 흔적만이 보이는 등 전반기의 특징을 골고루 나타내고 있다. 그 중 1점의 소매는 길에 달려 있는 소매 끝이 깔때기처럼 넓어지고 있어 광수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 무문의 명주 겹옷으로 황변과 갈변된 상태이다.
명주겹철릭2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포제로 치마폭을 넓게 만들어 마상의(馬上衣)로 적합하여 왕 이하 백관들이 원행시 융복(戎服)으로 착용하였으며, 조선 전기 출토 복식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철릭은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에 변화를 뚜렷하게 보이는 복식이다. 전기의 철릭은 상의와 하상의 비율이 대략 1:1 정도이며 퉁수형의 소매가 달린다. 그 중에는 반소매로 제작하고 긴 소매를 따로 만들어 연봉 단추로 연결하여 착용하는 탈착식의 소매가 많이 발견된다. 복식 유물 중 철릭 3점은 모두 조선 전기의 특징을 보인다. 깃은 이중깃 또는 외깃의 칼깃 형태이며, 상의와 하상이 모두 1:1 비율에 가깝고, 상의 폭은 13내지 14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치마 주름도 0.2cm내외의 잔주름이 잡힌 매우 정교한 바느질 상태를 보여준다. 겨드랑이에 사각 접은 무가 달리고 고름 바대를 대고 직접 붙이는 쌍고름이 달려 있으며, 소매는 모두 탈착 소매가 있는 형태이나 1점만 분리 소매가 남아있다. 2점은 매듭의 흔적만이 보이는 등 전반기의 특징을 골고루 나타내고 있다. 그 중 1점의 소매는 길에 달려 있는 소매 끝이 깔때기처럼 넓어지고 있어 광수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 무문의 명주 겹옷으로 황변과 갈변된 상태이다.
명주겹철릭3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포제로 치마폭을 넓게 만들어 마상의(馬上衣)로 적합하여 왕 이하 백관들이 원행시 융복(戎服)으로 착용하였으며, 조선 전기 출토 복식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철릭은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에 변화를 뚜렷하게 보이는 복식이다. 전기의 철릭은 상의와 하상의 비율이 대략 1:1 정도이며 통수형의 소매가 달린다. 그 중에는 반소매로 제작하고 긴 소매를 따로 만들어 연봉 단추로 연결하여 착용하는 탈착식의 소매가 많이 발견된다. 복식 유물 중 철릭 3점은 모두 조선 전기의 특징을 보인다. 깃은 이중깃 또는 외깃의 칼깃 형태이며, 상의와 하상이 모두 1:1 비율에 가깝고, 하의 폭은 13내지 14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치마 주름도 0.2cm내외의 잔주름이 잡힌 매우 정교한 바느질 상태를 보여준다. 겨드랑이에 사각 접은 무가 달리고 고름 바대를 대고 직접 붙이는 쌍고름이 달려 있으며, 소매는 모두 탈착 소매가 있는 형태이나 1점만 분리 소매가 남아있다. 2점은 매듭의 흔적만이 보이는 등 전반기의 특징을 골고루 나타내고 있다. 그 중 1점의 소매는 길에 달려 있는 소매 끝이 깔때기처럼 넓어지고 있어 광수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 무문의 명주 겹옷으로 황변과 갈변된 상태이다.
명주겹장옷 국가민속문화유산21-8호
소 재 지; 충남 당진시
한지를 심으로 사용하였으며, 5.5cm 나비의 사각 접음 무가 달려있다. 앞 길이가 132cm, 뒷길이 128.5cm이다. 홈질과 박음질을 사용해 제작하였고, 겉섶시접과 안섶시접의 솔기는 모두 길쪽으로 넘겨져 있으며, 모두 어슷올을 길쪽으로 하고 있어 각각의 앞단은 모두 곧은 올로 끝나게 되어 있다. 어깨는 솔기가 없도록 앞길과 뒷길이 연결되어 재단되었으며, 진동의 솔기는 길쪽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겉깃과 안깃은 모두 들여 달린 목판깃이며, 동정은 확인되지 않았다. 무 또한 어슷올을 길에 대고 곧은 올은 옆선으로 끝나게 한 오늘과 같은 형태이다. 안고름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겉고름은 2cm 나비의 20cm 길이가 두 개 있었으며, 같고름 중 겉섶에 달린 고름은 겉깃의 끝에, 마주 있는 우측 앞길의 겉고름은 들여 달린 안깃 끝에서 겨드랑이 쪽으로 10cm정도 들여 달려 있어 역시 이 시기에도 장옷을 머리에 쓰기 보다는 임란전과 마찬가지로 실제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주 소재의 이 겹 장옷은 길과 소매가 짙은 갈색으로 변한 상태이며 소매끝에 이어댄 소매부분이 황변된 것으로 보아 길과 소매 일부가 이 색으로 배색된 장옷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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