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 분할을 통해 생긴 잉여 공간

다락은 매달다란 뜻을 가진 ‘달-’을 어근으로 하여 ‘악-’이라는 명사화 접사가 결합된 말로서 ‘높은 곳’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지표보다 높게 바닥을 설치하여 만들어진 집 또는 방, 이층이나 중이층에 꾸며진 수장 공간(물건을 보관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의 다락은 단층으로만 지어지던 전통한옥의 일반적인 패턴의 틀에서 수직적 분할을 통해 잉여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물건을 보관하거나 때로는 어린 자녀들의 생활공간으로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전통한옥의 평면유형은 일자형에서 출발하여 경제적 여건에 따라 ㄱ자형, ㄷ자형, ㅁ자형으로 확장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평적 공간의 확장은 대지의 크기 및 시공비용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떻게 하면 기존의 틀을 건드리지 않고 가장 경제적인 공간 확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전통한옥 지붕부에 자투리 공간 활용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한옥에서 삼각형 모양의 지붕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수평 부재인 도리와 경사 부재인 서까래가 담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지붕은 선사시대부터 목구조를 이루는 뼈대가 되어왔다. 이 두 부재가 결구되면서 만드는 공간이 바로 지붕이 되는데, 아래 부분에 방을 만들거나 광을 만들거나 부엌을 만들면서 수평 반자를 설치하게 되면 낮은 높이지만 상당히 넓은 자투리 공간이 생긴다. 다락은 바로 이러한 낮은 공간의 자투리를 활용한 공간이며, 매우 경제적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활용한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잉여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건물 외관의 조화와 리듬의 요소, 그리고 기능의 창출

다락은 건물의 규모와 구조에 변화를 주지 않고 설치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한옥의 약 70% 이상이 다락을 가지고 있다. 다락의 위치는 부엌 상부가 가장 많은데, 이것은 부엌에 아궁이를 설치하기 위해 일반 방들보다 낮게 만들기 때문에 상부 공간을 분할하는 것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 상부에 설치하기도 하며, 방이나 외양간 상부, 문간 상부 등 다양하게 만든다. 다락은 필요에 따라 건물 한채에 다수의 다락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동의 하회 북촌댁 안채(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로, ㅁ자형 평면을 적극 활용하여 부엌, 광, 방 등 위에 6개나 되는 다락을 둠으로서 다양한 입면과 기능을 만든 좋은 예이다. 집안 대소사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부터 제사용기, 곡식, 서책 등의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기능을 두면서 바깥에 노출되지 않게 함으로써 오래 전부터 사대부가에서 긴요하게 활용했던 공간이 바로 다락인 것이다. 또 상주 양진당(보물 제1568호)의 우측 날개채 상부는 어린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생활하기도 했다. 한편 다락에 보관하던 물건에 따라 채광이나 통풍의 기능이 달리 요구되므로 다락에 설치하는 창호들 역시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만들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단순할 수 있었던 한옥의 입면을 다양하게 연출하였다.

 

남양주의 궁집(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의 안채는 정자살창(정사각형 형태로 세로살과 가로살을 구성한 창)을 했고, 안동 의성김씨 종택(보물 제450)의 사랑채는 빗살창(45도로 빗대어서 세로살과 가로살을 구성한 창), 경북 안동 임청각(보물제182호) 행랑채는 판문(나무 판으로 설치한 문),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은 봉창(벽에 작은 구멍을 낸 후 나뭇가지로 만든 창)을 설치하는 등 다락이 만들어진 위치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입면을 만들어줌으로써 회벽으로만 구성되어 단조로울 수 있는 입면에 변화를 준 것이다. 다시말해 다락은 다양한 기능을 가지면서 한옥 외관에서는 창호를 통해 조화와 리듬의 요소로써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외부로 부터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조절한 출입구

다락 출입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다락과 맞닿아 있는 벽에 벽장을 두고 이를 활용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이럴 경우 매우 사적인 수장 공간으로 사용되는데, 경주 양동마을의 향단, 영동 김참판 고택 안채, 함양 일두고택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대개 귀중한 서책과 장물 등을 보관하고 있어, 다른 이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실내의 방안에 출입구를 설치한 것이다. 외양간이나 광과 같은 수장 공간의 상부에 설치한 다락의 출입구는 직접 보이는 곳에 설치했다. 외부에 바로 면해 있으므로 마당에서 출입을 하게 되어있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되어있다. 예천 율현동 물체당(중요민속문화재 제174호), 안동 하회 북촌댁 안채의 창고 상부에 설치된 다락에서 볼 수 있다. 독특한 형태이긴 하지만 정읍 김동수씨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의 경우는 방에 부속된 반침 천정을 통해 다락으로 출입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매우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보물 제553호)과 같이 다른 다락을 거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집주인의 요구와 기능에 따라 다른 용도의 다락이 만들어졌다. 출입구가 그 기능에 따라 노출되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했던 것은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정도를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않았을까?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추억을 상기 시키는 보물창고

다락은 신비한 존재다. 그립고, 아쉽고, 또 생각하면 흐뭇해지는 보물창고다. 그 속에 추억이 함께 녹아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몸살감기에 걸리면 어김없이 엄마는 다락방 구석에 고이 보관하던 꿀단지를 끄집어 내셨다. 엄마는 수저 한가득 꿀을 입속으로 넣어 주셨다. 그 꿀맛은 세상 그 어떤 맛으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황홀함에 행복감에 빠져 스르르 잠들면 따뜻한 엄마 손은 내 이마를 어루만져 주셨다. 꿀단지는 엄마의 사랑이었고, 다락은 꿀단지를 고이 간직한 엄마의 마음이었다. 어른이 되어 보니 그 다락이 너무그립다’, ‘어릴 적 살던 집에 다락방이 있었고, 그 다락방에 올라가면 왠지 포근했던 기억. 다락방에서 비 내리는 천을 바라보던 그때가 그립네요’, ‘광도 있었지요. 집에서 달인 엿, 유과, 쌀과자가있던…’, ‘다락은 엄마의 보물단지였고 막내딸인 저는 그 다락의 보물단지에 손댈수 있는 특권을 누렸죠. 엄마가 그리워요.’

 

SNS에 남긴 어른들의 다락에 대한 기억이다. 다락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구조와 규모와 형태가 중요하지 않다. 다락은 엄마와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꼭꼭 숨겨놓은 과자를 내어놓으시기도 했고, 몰래 불러서 가래떡과 조청을 꺼내 주시기도 했고, 숨바꼭질 놀이의 주 무대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귀한 물건을 넣어 놓을 때가 많아서 어른들은 ‘그 속에 혼자 들어가면 무서운 귀신이 있으니 절대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고 하셨다. 무섭기도 했지만 도깨비 나라의 보물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보물창고였다. 그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의 연속선상에서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다락’이었다.

 

글. 김재홍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 대표)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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