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 주오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는 1892년 황해도 장연(長淵)의 대지주 장손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아버님은 소래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언더우드 박사가 이 교회 담임목사였고, 소래학교는 황해도 신교육의 산실였다.

김마리아는 3살 때 아버님, 13살 때 어머님을 여의고 독립운동가인 숙부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생활했다. 1906년 처음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연동(延東)여학교(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큰숙부 김용순은 김구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고, 작은 숙부 김필순은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고, 큰고모 남편 서병호는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으며, 넷째 고모 김순애는 김규식의 부인이고, 막내 고모 김필례는 YWCA 창설자인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1910년 정신(貞信)여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 정신여학교 교사를 지내다 191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 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장으로 활동하며, 동경유학생독립단에 참여했다. 1919년 동경(東京, 도쿄) YMCA에서 개최된 2·8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 뒤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기모노를 입고 오비(허리띠) 속에 은밀히 숨겨 귀국했다. 귀국 후 부산, 대구, 광주, 황해도 등 전국을 돌며 3·1독립운동 사전 준비에 진력했다.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하다 3월 6일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한쪽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모진 성고문 속에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석방된 뒤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여성비밀항일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부인회는 국내외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항일여성조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동지의 밀고로 비밀조직이 탄로나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독한 고문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1921년 비밀리에 상하이로 가 남경(南京, 난징) 금릉(金陵)대학에서 수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최초 여성의원으로 김구와 함께 황해도를 대표하여 나라를 되찾는 일에 앞장섰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 시카고대학,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외교를 통한 독립지원을 목적으로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재미한국인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일제의 만행을 서방국가에 알리는 데도 힘썼다.

1932년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농촌계몽과 기독교여성운동에 힘썼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장을 맡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치며 일제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 열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우정사업본부는 2019년 여성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김마리아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2·8독립선언서를 배경으로 그녀를 우표에 담았다.

누이야, 네 가슴에 타오르는 그 사랑을 뉘게 다 주랴 하오?
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 주오
누이야, 꽃 같이 곱고 힘있고 깨끗한 몸을 뉘게 다 주랴 하오?
네 앞에 팔 벌린 조선에 안기시오.
누이야, 청춘도 가고 사랑도 생명도 다 가는 인생이요
아니 가는 것은 영원한 조선이니,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치시오, 조선에!

이광수(1933)

[참고문헌]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2022, 김용균, 여름언덕,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정신’(정신여중·고동문회지), 2019, 정신여중·고총동창회. 정신 제11호, 출처. 인터넷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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