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는 “견훤(甄萱)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丁亥, 867)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性)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將軍)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甄萱)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진흥대왕(興大王)의 왕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駥夫人)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阿慈)이다. 아자개(阿慈)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将軍)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将軍)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将軍) 소개(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紫衣)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交㛰)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蚯蚓)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견훤(甄萱)의 세 아들이 반역(簒逆)하여 견훤(甄萱)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아들 금강(金剛)이 즉위하여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에 고려(髙麗)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웠으나 후백제(後百濟)가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다. 
처음에 견훤(甄萱)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지기가 크고 기개가 있어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서울(王京)로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에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 삼아 적을 대비하였으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신라(新羅) 진성왕(真聖王)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國權)을 농간(竊弄하니 기강(紀綱)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饑饉)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甄萱)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京)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천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고 하였다. 용기(龍紀) 원년(元年) 기유(己酉, 889)였다. 혹은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둑 양길(良吉)의 세력이 몹시 강성하여 궁예(弓裔)는 스스로 그의 부하가 되었다. 견훤(甄萱)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良吉)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甄萱)이 서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하였다. 견훤(甄萱)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百濟)가 나라를 열은 지 6백여 년에 (唐)나라 고종(高宗)은 신라(新羅)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수군(水軍)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新羅)김유신(金庾信)은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百濟)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러니 내가 이제 어찌 국도를 정하여 예전의 원한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고 일컫고 관직을 설치했으니 이때가 당(唐)나라 광화(光化) 3년(900)이요,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이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918)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甄萱)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甄萱)은 우리 태조(太祖)와 겉으로는 화친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는 태조(太祖)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3년(925)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대적하였다. 견훤(甄萱)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태조(太祖)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甄萱)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堂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甄萱)도 역시 외생질(外甥) 진호(真虎)를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甄萱)은 거서(居西,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후당(後唐)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 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侍中 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食邑) 2천 5백 호로 하였다.
4년에 진호(真虎)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王信)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驄馬)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太祖)는 웃으면서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견훤(甄萱)은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니, 신라왕(新羅王)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太祖)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甄萱)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울주(蔚州)를 습격하여 빼앗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의 서쪽 교외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왕도로 들어갔다. 신라왕(新羅王)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을 때여서 이로 말미암아 더욱 쉽게 패하였다. 견훤(甄萱)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내어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아우(王弟) 효렴(孝廉)과 재상(宰相)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또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들이며 여러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도 친히 데리고 갔다.
태조(太祖)는 정예(精銳) 기병(騎兵)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甄萱)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 태조(太祖)의 장수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太祖)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래서 견훤(甄萱)에게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죄악을 짓게 내버려 두었다. 견훤(甄萱)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 지금의 약목현(若木縣)경산부(京山府),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義成府) 태수(太守) 홍술(洪述)이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太祖)는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오른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42년 경인(庚寅, 930)견훤(甄萱)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부(安東府)를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진(營寨)을 치니 태조(太祖)는 백보(百步) 가량을 떨어져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진(營寨)을 쳤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甄萱)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견훤(甄萱)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능히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태조(太祖)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으로 삼았다. 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니, 원봉(元逢)이 본래 순주성(順州城)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라(新羅)의 임금과 신하(君臣)들은 쇠망해 가는 시기에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우므로 우리 태조(太祖)를 끌어들여 우호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甄萱)은 이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신라 왕도(王都)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했는데, 태조(太祖)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太祖)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지난번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鼈)큰 자라(黿)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 하는 것이었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韓鉞)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타일렀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表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잇게 하여 임금이 있게 되었다. 그대는 나의 충고(忠告)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책으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은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으며 그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며, 내가 바라는 것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高麗)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선린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는데 근래에 양편의 볼모가 북은 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본도로 가게 하고, 또 고려(高麗)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길이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에 돈독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데 전념해 오던 터에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으로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기를 바란다. 토끼(兔)와 사냥개(獹)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요, 조개(蚌)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마땅히 미혹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라.”
천성(天成) 2년(927) 정월에 태조(太祖)는 답서를 보내어 말하였다.
“삼가 오월국(吳越國)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었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다. 화초부사(華膚使)가 조서를 가지고 왔고, 그대의 편지에서도 아울러 가르침도 받았다. 조서(詔書)를 받들어 읽고는 비록 감격을 더했으나 그대의 편지를 펴 보고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으니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나의 심중을 말하려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職權)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속하게 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다.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고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 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다. 계유(癸酉, 913) 10월에 이르러 갑자기 사건을 일으키니 곧 싸움에까지 이르렀다.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달려드는 것이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감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神)이 벌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전쟁을 하지 않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 어찌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蠆)과 같은 독기는 생민(生民)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狼虎)같은 난폭함은 기전(畿甸)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급(窘急)해지고 황옥(黃屋, 왕실)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대의에 의거해서 (周)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覇業)과 같으며 기회를 타서 (漢)나라를 도모하니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의 간악함을 볼 뿐이오. 지극히 존귀한 왕으로 하여금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질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근심하였다. 이에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목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하였다.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싣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獍)과 올빼미(梟)보다 더 심하였다.
나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원한과 해를 뒷걸음질치게 하는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는 듯한 힘으로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하였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지났는데 육전에서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전에서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일을 하는 데 헛됨이 없었다. 윤경(尹卿)을 해안까지 쫓았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밖에서 잡았을 때에는 엎드린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목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밖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다. 이산군(伊山郡)인 듯하다.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 영내의 현 이름)은 쳐부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허물어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하였다.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귀속되었다. 공략한 지역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반드시 저수(泜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의 첩첩이 쌓인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의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일전 승리의 소원을 이룩하여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그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다. 하늘이 돕는 것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殿下)의 덕이 먼 지역까지를 포괄하고 인(仁)은 약한 자들을 애무(愛撫)하던 지라 특히 대궐에서 조서를 내려 동방(青丘)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도 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상국(上國)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東海)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을 능히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장흥(長興) 3년에 견훤(甄萱)의 신하 공직(龔直)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甄萱)공직(龔直)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龔直)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髙麗) 예성강(禮成江)으로 침입하여 사흘 동안 머물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州)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운운(云云)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甄萱)태조(太祖)운주(運州,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뽑아 재빨리 이르렀으나 미처 진영을 설치하기도 전에 장군(將軍) 금필(黔弼)이 날랜 기병으로 이를 쳐서 3천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 이북(以北)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甄萱)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원(醫者) 지겸(之謙),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太祖)에게 항복했다.
병신(丙申, 936) 정월에 견훤(甄萱)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新羅) 말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高麗)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高麗)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高麗王)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견훤(甄萱)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혹은 견성(甄成)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甄萱)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의 형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이 알고 몹시 근심하고 번민하였다. 이때 양검(良劍)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龍劍)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어서 홀로 신검(神劍)만이 견훤(甄萱)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康州)와 무주(武州)에 보내서 양검(良劍) 등과 모의하였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봄 3월(935년)에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神劍)을 권해서 견훤(甄萱)을 금산(金山)의 불당(佛堂)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金剛)을 죽였다. 신검(神劍)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 운운(云云)
처음에 견훤(甄萱)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神劍)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神劍)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金山)의 불당(佛堂)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 아이(可憐完山兒)
아비를 잃어 울고 있도다(失父涕連洒)
견훤(甄萱)은 후궁(後宫)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4월에 이르러 술을 빚어서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였다. 이에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부(尙父)라고 하고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였으며 양주(楊洲)의 식읍(食邑)·전장(田莊)과 노비(奴婢)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견훤(甄萱)의 사위 장군(将軍) 영규(英規)가 비밀리에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髙麗)로 가셨오. 대체로 정조 있는 여자(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忠臣)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髙麗)왕공(王公)은 어질고 후덕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한 것인가 하오.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太祖)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內應)하여 고려(髙麗)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太祖)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英規)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해져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된다면, 곧 먼저 장군(将軍)을 뵙고 다음에 당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6월에 견훤(甄萱)태조(太祖)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殿下)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殿下)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적자(賊子)와 난신(亂臣)을 죽이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太祖)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太子) 무(武)와 장군(将軍)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가을 9월에 태조(太祖)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神劒)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甲午)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太祖)견훤(甄萱)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을 향해갔다. 이에 북을 치고 나아가니 후백제(百濟)의 장군(将軍)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太祖)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将帥)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孝奉) 등이 말하기를, “원수(元帥) 신검(神劒)은 중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는 장군(将軍) 공훤(公萱)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百濟軍)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神劒)은 두 아우와 장군(将軍)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太祖)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太祖)능환(能奐)에게 묻기를, “처음에 양검(良劒)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로서 의당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하니 능환(能奐)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그를 목베어 죽이게 하였다. 신검(神劒)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므로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다. 견훤(甄萱)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사(佛舎)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太祖)의 군령(軍令)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太祖)영규(英規)에게 말하기를,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좌승(左承)이란 벼슬과 밭 1천 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甄萱)당(唐)나라 경복(景福) 원년(元年, 892)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 원년(936)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에 망했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게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猬毛)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弓裔)는 본래 신라(新羅)의 왕자(王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못한 것이 너무 심하였다. 견훤(甄萱)은 신라(新羅)의 백성으로 일어나서 신라(新羅)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신라(新羅)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弓裔)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甄萱)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漢)과 (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弓裔)견훤(甄萱)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太祖)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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