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기(駕洛國記)
고려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개벽(開闢)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九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户),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산봉우리(峯巒)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九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龜旨)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밀어라(首其現也).
만일 내밀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먹으리(燔灼而喫也)’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以之蹈舞).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紫䋲)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紅幅褁)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黄金卵)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顔)은 용(龍)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眉)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眼)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이라고 하였다.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하니 곧 여섯 가야(六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伽耶)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國尾)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茅茨)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土階)은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畓)자는 속(俗)자이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蓼葉)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16나한(十六羅漢)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7성(七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丁壯),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脫解)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天命)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脫解)가 변해서 매(鷹)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鷲)가 되었고, 또 탈해(脫解)가 변해서 참새(雀)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鸇)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脫解)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脫解)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鷹)가 독수리(鷲)에게, 참새(雀)가 새매(鸇)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舟師)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脫解)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舟師)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新羅)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降靈)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處女)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伉儷)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朕)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朕)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하였다.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乘岾)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緋㠶)을 단 배가 붉은 기(茜旗)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干) 등은 먼저 망산도(望山島)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神鬼干)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桂)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王后)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留天干) 등이 돌아가서 왕후(王后)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王后)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侍從)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臧獲)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王后)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그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媵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媵臣)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臧獲)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蘭液)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蕙醑)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王后)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王后)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로 성(性)은 허(許)이고 이름(名)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年二八)입니다. 본국(夲國)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父王)과 모후(皇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上帝)께서는 가락국(駕洛國)의 왕(元君)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卿)들은 공주(公主)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皇天)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公主)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公主)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王后)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媵臣)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王后)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媵臣)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王后)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농부(野夫)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고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熊)의 몽조(夢兆)를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처음 와서 닻줄(纜)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茜旗)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媵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나라에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臧獲)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步)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仇衡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新羅) 제30대 왕 법민왕(法敏)은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이끌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다. 따라서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당했으나 그를 장사지낸 묘(廟)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 인하여 그 옛 궁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묘(廟)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비용으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해 때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밥·차·과실 등 여러 맛있는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居登王)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그 향기로운 효사(孝祀)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居登王)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묘(廟)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그 구형왕(仇衡王)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이 묘(廟)에 지내는 제사지내는 예를 가끔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법민왕 시호)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향하였다.
신라(新羅) 말년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金官) 고성(高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英規) 아간(阿干)이 장군(將軍)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端午)를 맞아 사당에 제사(告祠)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져서 인하여 깔려 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스스로 말하기를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진영(眞影)을 그리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그윽한 은혜를 갚아야겠다”라고 하고, 교견(鮫絹) 3척(三尺)을 가지고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겨우 3일 만에 진영(眞影)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 정도가 되었다. 장군(將軍)은 매우 두려워하여 그 진영(眞影)을 받들어 가지고 사당을 나가서 불태우고 곧 수로왕(首露王)의 친자손(真孫)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인가. 이는 필경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眞影)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진노한 것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렵게 여겨 진영(眞影)도 이미 태워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주살을 받을 것이다. 경(卿)은 왕의 진손(真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圭林)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나이 88세에 이르러 죽었고,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英規)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서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그런데 옛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앞서 영규(英規)가 있고 뒤에는 준필(俊必)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적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서 7, 8명을 맞혀 죽이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큰 구렁이가 있었는데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사당 옆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팍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에 처음 만든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한지 31년인 대강(大康) 2년 병진(丙辰, 1076)까지 도합 878년인데 제단을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으며, 하물며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오직 가락국(駕洛國)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곧 체부(替否)의 말이 맞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廟)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곧 체부(替否)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이 중에 또 놀이를 하여 수로왕(首露王)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백성(土人)·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乗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首露王)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가락국(駕洛國)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新羅)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태조(太祖)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이었다.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수로왕(首露王)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結)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崩)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陵廟)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 양전사의 별칭)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量田使)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結) 87부(負) 1속(束)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世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수로왕(元君)과 허황후(皇后)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結)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長遊寺)의 삼강(三綱)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長遊寺)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王后寺)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시조(世祖) 이하 9대손(九代孫)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다.
인륜(人倫)은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지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겠는가.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냈다.
산 속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하였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있었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맑게 개었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가닥 자색 줄에 드리웠다.
낯선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렸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곧 맑아지려 하였다.
궁전은 옛 법을 따랐고, 흙계단(土階)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베풀었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하였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하였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모든 백성은 태평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하였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金)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마품왕(麻品王) 또는 마품(馬品). 김씨(金氏)이고,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弥)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弥王) 또는 금물(今勿). 김씨(金氏)이고,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56년으로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8일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金氏)이고 영화(永和)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62년으로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407년)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王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또는 김질(金叱). 의희(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에게 장가를 들어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웠다. 계림국(鷄林國)이 꾀를 써서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傭女)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5월 12일(421년)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또는 질가(叱嘉). 영초(永初)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1년으로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王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또는 김질왕(金銍王).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시조(世祖)와 허황옥(許黄玉) 왕후(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世祖)와 혼인한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492) 10월 4일(492년)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으로 왕자(王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또는 김겸왕(金鉗王).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0년으로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王妃)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王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이고 정광(正光)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보정(保定) 2년 임오 (壬午, 562) 9월에 신라(新羅) 제24대 진흥왕(真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王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新羅)에 들어갔다. 왕비(王妃)는 분질수이질(分叱水尒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新羅)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新羅)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首露王)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 임자(壬子, 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이다. 그러면 30년을 더하여 도합 520년이다. 지금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