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절 입구 산기슭서 온갖 기도 이루어주시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부처님
천년세월 흥망성쇠 함께 해
마애불에서 기도해 병고 벗어난
많은 영험담 내려와

미타사로 향하는 길 언덕배기 좌측 비가림 시설 아래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높이 4.05m의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하(盛夏)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 7월2일. 전국의 사찰에서는 백중기도를 입재하며 선망부모를 비롯한 조상님들의 천도기도를 시작했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위치한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을 친견하러 가는 사찰입구에서 큰 규모의 납골시설을 먼저 만났다.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이 조성돼 있는 납골시설의 수많은 형상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업장을 녹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보살의 원력이 느껴진다. 사찰 일주문 옆 연지(蓮池)에 피어있는 백련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로하는 듯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납골시설을 뒤로 하고 미타사로 향하는 길 언덕배기 좌측에 비가림 시설 아래에 발길을 멈춘다. 거대한 자연석에 조성돼 있는 마애부처님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좌측 산기슭 계단을 만들어 잘 정비한 곳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높이 4.05m의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사찰이 정비되기 전에 모습은 산기슭에 눈비를 맞으며 뭇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것으로 보인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현재 복원된 미타사의 역사보다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양식을 계승해 고려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가까이서 올려다 본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모습.


미타사 주지 희원(熹圓)스님에 따르면 사찰의 창건은 신라시대 원효스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 때는 유룡사로 불렸다고 한다. 용바위가 있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마애불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이 이야기는 주지스님이 17년 전 입적한 은사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마애불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니 그때 나라의 수도가 개성이었을 겁니다. 고려시대에는 첩첩산중이었는데 이 곳 사찰에서 신심 깊은 불자가 100일 기도를 하고 내려가다가 삿갓을 쓴 한 도승을 만났는데 당신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회향했으니 이 길로 개성 어느 곳을 가면 큰 화주를 만날 것이니 그 분에게 이 곳에 마애불을 조성할 수 있도록 부탁하면 뜻을 이룰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 길로 신심 깊은 불자님이 개성으로 향해 그 장소로 가보니 도승이 말한대로 큰 부호가 있어 미타사마애불 조성에 힘을 보태 대작불사를 회향할 수 있었다고 해요."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사찰 진입로 개울가에 솟아 있는 수직 암벽에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축대를 쌓고 별도의 예배석(禮拜石)을 설치했다. 덕성여대 최성은 교수는 이 마애불을 조사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m가 넘는 거불(巨佛)로 상체는 둘레를 얇게 파낸 후 고부조(高浮彫, 높은 돋을새김)로 처리하여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아래로 가면서는 차차 약화되어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에 그치고 있다. 불상의 얼굴은 비만한 방형(方形,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신체에 비해 다소 커다란 편이다. 넓은 이마에는 관모(冠帽, 벼슬을 받은 이들이 썼던 모자)를 쓰고 있다.

반원을 그리고 있는 양 눈썹은 윤곽이 분명하다. 눈두덩과 두 눈의 표현은 다소 희미하나 미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넓적한 코가 친근감을 준다. 두툼한 입술은 아래위를 살짝 눌러 지그시 다물고 있다. 빚은 듯한 양 귀는 어깨까지 늘어졌다. 양 뺨이 부푼 후덕한 모습이다. 살이 많이 오른 장대한 어깨에는 양어깨를 감싸는 통견(通肩) 형식의 대의가 걸쳐져 있다.

옷 주름의 표현이 상당히 형식화되고 있다. 가슴 앞으로는 날카로운 이중의 V자형 옷자락 무늬가 늘어지고 있다. 그리고 양 소맷자락과 하단부에도 몇 줄의 규칙적인 사선 주름이 거칠게 접혀지고 있다. 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평판적인 소략한 착의 형태를 보여 준다. 손 모양 또한 전반적인 마멸로 인하여 형태 파악이 상당히 어렵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고 있는 오른손의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식별할 수 있다.

그리고 왼손은 새끼손가락을 펴고 있어 아미타설법인(阿彌陀說法印)을 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원만한 상호와 착의 형식, 약한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1973년 법당 정리 작업 도중 출토된 미타사 소재의 금동불상과 동시대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부처님을 조성한 시주자와 기도객의 원력이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시주는 마애부처님의 상호에 관모를 씌워 나라의 벼슬에 오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한 원력은 당시 미타사를 거쳐 도읍인 개성으로 향하는 과거 수험생들에게도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뭇 중생들이 죽어서 서방정토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을 담아 수인(手印)을 아미타설법인으로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미타사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미타사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부침(浮沈)을 거듭했고, 이곳 마애여래입상은 상호에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덕분에 사찰은 중건을 거듭해 현재의 반듯한 미타사의 사격(寺格)을 갖춘 듯하다.

미타사 주지 희원스님은 "미타사의 모습 이전에도 마애부처님이 계셨고, 그로인해 미타사가 여러차례 발굴을 통해 약사전의 석불과 금동불상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나와 미타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며 "마애불에서 기도해 병고에서 벗어난 많은 불자들의 영험담이 내려오고 미타사 약사전의 석조약사여래부처님도 영험해 유명기도 도량으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의 몸을 받아 불법(佛法)을 만나 부처님을 조성한 공덕은 참으로 지중한 일이다. 여기에 조성한 부처님이 세세생생 뭇 중생들의 예배대상이 되고 발원하는 기도자들의 원이 이루어지는 인연은 기쁘게 찬탄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전국의 많은 마애부처님이 조성돼 있지 않았을까.

음성 미타사를 방문한 날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테니스선수 꿈나무 불자들이 템플스테이 체험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불심(佛心)을 돈독히 다져 선심(善心)을 쌓아 국가를 선양하길 기원한다면 미타사 마애부처님은 또 다시 자애로운 미소로 그들의 발원에 화답하리라 믿는다.

음성=여태동 기자 [불교신문 37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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