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찬술한 것이고 승안(承安) 4년 기미(己未, 1199)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真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살에 이르러 뜻이 출가(出家)에 있으니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율사(律師)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는 사미계법(沙弥戒法)을 주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전하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지장(地藏) 두 보살(两聖)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회(懴悔)를 구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라고 하였다. 율사(律師)가 가르침을 받들고 이별하여 물러나와 명산(名山)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나이가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 760)에 20두의 쌀을 찌고 이에 말려서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으로 가서 변산(邊山) 불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가서 5홉의 쌀을 하루의 소비로 하고 쌀 1홉을 제하여 쥐(鼠)를 길렀다. 율사(律師)가 미륵상(弥勒像) 앞에서 계법(戒法)을 부지런히 구하기를 3년이 지나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였다.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青衣童)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두었다. 율사(律師)는 다시 뜻을 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고 돌을 두드리며 참회(懴悔)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꺾여 떨어졌고 7일 밤이 되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석(金錫)을 흔들고 와서 가지(加持)하자 손과 팔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드디어 가사(袈裟)와 바리(鉢)를 주었고 율사(律師)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精進)하였다. 21일을 채우자 즉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에 지장(地藏)·미륵(慈氏)보살이 앞에 나타나고, 미륵(慈氏)보살이 율사(律師)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잘하는도다. 대장부(大丈夫)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懴悔)를 간절히 구하는도다.” 지장(地藏)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慈氏)은 다시 2개의 생(栍)을 주었는데 하나는 9자(者)라고 쓰여 있었고 하나는 8자(者)라고 쓰여 있었다. 율사(律師)에게 일러 말하였다. “이 두 간자(二簡子)는 나의 손가락 뼈인데, 이는 시각(始覺)·본각(本覺) 2각을 이른다. 또한 9자(者)는 법(法) 자체이고 8자(者)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로써 마땅히 과(果)·보(報)를 알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생에는 도솔천(兠率)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고 두 보살(两聖)은 즉 사라졌다. 이때가 임인(壬寅, 4월 27일이다.
율사(律師)는 교법(教法)을 받기를 마치자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고자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자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玉袈裟)를 바치고 8만 권속(八萬眷屬)을 이끌고 시위하며 금산수(金山藪)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慈氏)보살이 도솔천(兠率)으로부터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律師)에게 계법(戒法)을 주었는데, 율사(律師)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弥勒丈六像)을 조성하게 하였다. 또 금당(金堂)의 남쪽 벽에 내려와서 계법(戒法)을 주는 위의(威儀)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갑진(甲辰, 764) 6월 9일에 조성되어 병오(丙午, 766) 5월 1일에 금당(金堂)에 안치되었으니, 이해는 대력(大曆) 원년이다.
율사(律師)는 금산사(金山)를 나와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였는데 길에서 소달구지(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律師) 앞을 향해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소달구지(牛車)를 탄 사람이 내려서 묻기를 “어떤 이유로 이 소들이 화상(和尚)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화상(和尚)은 어디에서 오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율사(律師)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진표(真表)라는 승려(僧)인데, 나는 일찍이 변산(邊山)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서 미륵(弥勒)·지장(地藏) 두 성전(两聖前)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真栍)을 받고 절을 짓고 머물러 오래 수도(修道)할 곳을 찾고자 한 까닭으로 온 것이다. 이 소들은 겉은 미련하나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戒法)을 받은 것을 알고 법(法)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으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듣기를 마치고 이내 “축생(畜生)도 항상 이와 같은 신심(信心)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 어찌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고 즉 손으로 낫(鎌)을 잡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율사(律師)는 자비심(悲心)으로써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戒)를 주었다. 속리산(俗離山)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핀 곳을 보고 그것을 표시해 두었다.
돌아서서 명주(溟州) 해변(海邉)으로 향하여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 자라(魚鼈黿鼉) 등의 무리가 바다에서 나와 율사(律師)의 앞으로 와서 몸을 이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律師)가 그것을 밟고 바다로 들어가 계법(戒法)을 암송하고 돌아서 나왔다. 가다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창건하고 점찰법회(占察法㑹)를 열었다. 7년을 살았는데 이때 명주(溟州)의 경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려서 율사(律師)가 이를 위해 계법(戒法)을 설(說)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 삼보(三寶)를 지극히 공경하였다. 갑자기 고성(高城) 해변(海邉)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스스로 죽어서 나오니 백성들이 이것을 팔아서 식량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율사(律師)는 발연수(鉢淵藪)를 나와 다시 불사의방(不思議房)으로 갔고 그런 후에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를 뵈기도 하고 혹은 진문(真門) 대덕(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하였다. 이때 속리산(俗離山) 대덕(大德) 영심(永深)이 대덕(大德) 융종(融宗)·불타(佛陁) 등과 함께 율사(律師)가 있는 곳에 와서 청하였다. “우리들은 1,000리를 멀지 않다 여기고 계법(戒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원컨대 법문(法門)을 주십시오.” 율사(律師)가 묵묵히 대답이 없었다.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桃樹) 위로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勇猛)하게 참회(懴悔)하였다. 율사(律師)가 이에 가르침을 전하여 관정(灌頂)을 하고, 드디어 가사(袈裟)와 바리(鉢),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한 권, ≪일찰선악업보경(日察善惡業報経)≫ 두 권과 생(栍) 189개를 주었다. 또 미륵(弥勒)의 진생(真栍) 9자와 8자를 주고, 경계하여 말하였다. “9자는 법(法) 자체이고 8자는 신종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맡기었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俗離山)으로 돌아가라.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자라는 곳이 있으니 여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여기에 따라 법을 가르쳐서 인간계(人間界)와 천계(天界)를 널리 제도하고 후세에 널리 펼쳐라.” 영심(永深)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곧바로 속리산(俗離山)으로 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창건하고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영심(永深)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占察法㑹)를 열었다.
율사(律師)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수(鉢淵藪)에 이르러 같이 도업(道業)을 닦으며 효를 다하였다. 는 세상을 뜰 때 절의 동쪽 큰 바위(東大巖) 위에 올라 죽으니 제자들이 시신을 옮기지 않고 공양(供飬)하고 해골이 흩어져 떨어질 때에 이르러 흙을 덮어 묻고 이에 무덤으로 삼았다. 푸른 소나무(青松)가 곧 나왔다가 세월이 오래 지나자 말라죽었고, 다시 나무 한 그루가 났고 후에 다시 한 그루가 났는데 그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도 두 나무가 있다. 무릇 공경을 다하는 사람은 소나무 아래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고 혹은 못 얻기도 한다.
나는 율사(聖)의 뼈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정사(丁巳, 1197) 9월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모아 통에 담으니 3홉 가량이 되었다. 큰 바위 아래 두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안장하였다고 했다. 여기에 기록된 진표(真表)의 사적(事跡)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을 간추려서 실었다. 후세의 현명한 이들은 이를 상고해보아야 한다. 무극(無極)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