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정률(慈藏㝎律)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고 본래 진한(辰韓) 진골(真骨)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3급의 관작(官爵)명이다. 그 아버지는 청요직(淸要職)을 지냈으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삼보(三寶)에게 귀심(歸心)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고 자식 하나 낳기를 빌었다. 기원하여 말하기를 “만약 남자를 낳으면 내놓아서 법해진량(法海津梁)으로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문득 별이 떨어져서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태어나니 석가세존(釋尊)과 같은 날이었으므로 선종랑(善宗郞)이라 이름하였다. 정신과 마음이 맑고 깊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넉넉해졌으나 세속의 추구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속세의 어지러움을 꺼려서 처자(妻子)를 버리고 전원(田園)을 내놓아 원령사(元寧寺)를 만들었다.
홀로 깊고 험준한 곳에 거하여 이리와 호랑이(狼虎)를 피하지 않고,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곧 작은 집을 지어 주변에 가시덤불로 막고, 알몸으로 그 안에 앉아서 움직이면 쉽게 찔리게 하고, 머리는 대들보에 매달아서 혼미함을 없앴다.
마침 태보(台輔, 제상) 자리가 비어서 문벌(門閥)이 선택되기 마땅하여 누차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명하여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라고 하였으나 자장(慈藏)은 그것을 듣고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고 죽지 백 년 동안 계를 어기고 살고자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일을 듣고, 왕이 허락하여 출가(出家)하게 하였다. 이에 바위산에 깊이 은거하고 양식을 돌보지 않았는데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와서 바치니 손을 내밀어 먹었다. 갑자기 천인(天人)이 와서 5계(五戒)를 주는 꿈을 꾸고 바야흐로 처음으로 속세로 나오니 향읍(鄕邑)의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慈藏)은 스스로 변방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여 서쪽에서 불교의 교화(大化)를 배우기를 바랐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 636) 곧 정관(貞觀) 10년에 칙명을 받아 문하의 중(門人僧)인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서쪽으로 당(唐)에 들어가 청량산(淸凉山)을 찾아갔다. 산에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相)이 있는데, 그 나라에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제석천(帝釋天)이 석공(工人)을 이끌고 와서 조각한 것이다”라고 한다. 자장(慈藏)이 소상(塑相)의 앞에서 기도하며 명감(冥感)을 하고는, 소상(塑相)이 정수리를 쓰다듬고 범게(梵偈)를 주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도 뜻을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이상한 중(異僧)이 와서 풀이해 주고 이미 황룡사탑편(皇龍塔篇)에 나왔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우더라도 아직 이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가사와 사리(袈裟舎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慈藏)은 처음에 그것을 숨겼기 때문에 ≪당고승전(唐僧傳)≫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자장(慈藏)은 자신이 성인의 기별(聖莂)을 꿈꾼 것을 알고, 이에 북대(北臺)를 내려가 태화지(太和池)로 갔다.
장안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 위로(慰撫)하였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안치하고 총애하여 사여하는 것이 자못 후하였다. 자장(慈藏)은 그 번잡함을 싫어하여 표를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벼랑에 들어가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3년을 거하였다. 인신(人神)이 계를 받고 신령의 응함이 매양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이미 다시 장안으로 가니 또한 칙명으로 위로(慰撫)하고 견(絹) 200필을 주어 의복과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신라(新羅) 선덕왕(宣德王)이 표를 올려 돌아오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불러 궁으로 들어오게 하고 견(絹) 1령(領)과 각종 비단(雜綵) 500단(端)을 사여하였고, 동궁(東宮) 또한 200단(端)을 주었으며 또한 예물도 많이 주었다. 자장(慈藏)은 신라(新羅)에 경전과 불상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대장경(藏経) 1부 및 여러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요청하여 모두 실었다. 귀국하자 온 나라가 환영하였다. 왕은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도록 명하고, ≪당전(唐傳)≫에는 왕분사(王芬寺)라 쓰여 있다. 지급하는 것과 시중(侍衛)을 많고 극진하게 하였다. 어느 여름 궁 안에 이르러 대승론(大乘論)을 강의하게 청하였고, 또한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夲≫을 일곱 낮, 일곱 밤을 강연하게 하였는데, 하늘에서 단비(甘澍)가 내리고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 강의하는 법당을 덮어 사중(四衆)이 그 신이함에 감복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불교가 동쪽으로 점점 퍼진 것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주지(住持) 수봉(修奉)함에 규범이 없다. 무릇 통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상계하니 칙서를 내려 자장(慈藏)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무릇 승니(僧尼)의 일체 법규를 승통(僧統)에게 모두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다. 살펴보건대, 북제(北齊) 천보(天保) 연간에 나라에서 10통(十統)을 설치하였는데, 유사(有司)가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청하여 이에 문선제(文宣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를 대통(大統)으로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으로 삼았다. 또한 양(梁)·진(陳) 사이에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의 명칭이 있었고, 모두 소현조(昭玄曹)에 속해 있었는데 소현조(昭玄曹)는 곧 승니(僧尼)를 다스리는 관명이다. 당초(唐初)에는 또한 10대덕(大德)이 성(盛)하였다.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1인을 두었고, 또한 소서성(小書省) 2인을 두었다. 다음해 신미(辛未, 551)에 고구려(髙䴡)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는데 또한 사주(寺主)라고도 하였고, 보량법사(寶良法師)를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아 1인을 두었고 주통(州統) 9인, 군통(郡統) 18인 등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이르러 다시 대국통(大國統) 1인을 두니 대개 상설직이 아니었다. 역시 부례랑(夫禮郞)을 대각간(大角干)으로, 김유신(金庾信)을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元年, 785)에 이르러서는 또 승관(僧官)을 설치하였는데 이름이 정법전(政法典)으로 대사(大舍) 1인, 사(史) 2인을 관리로 삼았는데 승려(僧) 중에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을 뽑아 삼았고 유고(有故)시에는 곧 교체하였으며 연한(年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는 또한 율종(律宗)을 구별한 것이다. 향전(郷傳)에서 자장(慈藏)이 당(唐)에 들어가자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이르러 맞이하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기를 요청하니 하늘에서 감로(甘露)가 내려 비로소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운위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과 ≪국사(國史)≫에는 모두 그러한 문장이 없다.
자장(慈藏)은 이 좋은 기회를 만나 과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승니(僧尼) 5부(部)로 하여금 각각 구학(舊學)을 늘리고 반 달마다 계(戒)를 설명하고 겨울과 봄에 모두 시험하게 하여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를 알게 하였으며 관원을 두어 이를 유지하게 했다. 또한 순사(巡使)를 보내 외사(外寺)를 돌며 검사하고 승려(僧)들의 잘못을 살피며 경전과 불상을 엄중하게 정비하여 규정형식을 만들었다. 한 시대의 불법을 보호함이 이때에 가장 융성하였다.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가 악(樂)을 바로잡아 아송(雅頌)이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의 사람들이 계(戒)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것이 열 집에 여덟 아홉이었고, 머리를 깎고 출가하기를 청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여 계단(戒壇)을 짓고서 사방에서 오는 것을 받아들였다. 계단(戒壇)의 일은 이미 위에 나왔다. 또한 태어난 마을의 집을 고쳐 원녕사(元寧寺)를 조영하고 낙성회(落成會)를 베풀어 ≪잡화경(雜花經)≫의 만개의 게(偈)를 강연하니 52녀(五十二女)의 현신(現身)이 감동하여 들었다.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그 수만큼 나무를 심어서 그 기이함을 나타나게 하고, 인하여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일찍이 나라의 복장(服章)이 중국(諸夏)과 같지 않으므로 조정에 건의하니 허락하여 좋다고 하였다. 이에 진덕왕(真德王) 3년 기유(己酉, 649)에 중국(中朝)의 의관(衣冠)을 입기 시작했다. 다음해 경술(庚戌, 950)에 또한 정삭(正朔)을 받들어 처음으로 영휘(永徽) 연호를 썼다. 이후 매번 조공(朝覲)할 때마다 반열이 상번(上蕃)에 있었는데, 자장(慈藏)의 공로이다.
만년(晩年)에 서울을 떠나 강릉군(江陵郡) 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살았다. 다시 이상한 스님(異僧)이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북대(北臺)에서 본 모습이었다. 와서 말하기를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너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놀라서 깨어나 아침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이 온 것에 감응하여 법요(法要)를 물으니 이에 말하기를 “다시 태백산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라고 하고 마침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송정(松汀)은 지금 가시나무(荊刺)가 나지 않고 또한 매·새매(鷹鸇) 종류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慈藏)은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그를 찾았는데 큰 구렁이(蟒)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일러 “이곳이 이른바 갈반지(葛蟠地)이다”라고 말하고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를 창건하고서 문수대성(聖)이 내려올 것을 기다렸다. 어떤 늙은 거사(老居士)가 남루한 방포(方袍)를 입고 칡으로 엮은 삼태기(葛簣)에 죽은 강아지(死狗)를 담고 와서 시종에게 “자장(慈藏)을 보려고 왔다”고 하였다. 문인(門者)이 말하기를 “스승님을 받들면서부터 아직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렇게 미친 말을 하는가”라고 하니 거사(居士)가 “다만 너희 스승에게 고하기만 해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들어가 고하니 자장(慈藏)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하였다. “아마 미친 자인가.” 문인(門人)이 나가서 그를 내쫓으니 거사(居士)가 “돌아간다. 돌아간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이에 삼태기를 뒤집어 터니 개가 사자보좌(師子寶座)로 변하였고 거기에 올라타고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자장(慈藏)이 그것을 듣고 비로소 예법에 맞는 몸가짐(威儀)을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쫓아 올라갔으나 이미 묘연하여 미치지 못하고 드디어 쓰러져서 죽었다. 유골(遺骨)을 다비하여 굴속(石穴)에 안장하였다.
무릇 자장(慈藏)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매양 하나를 일으켜 만들 때 반드시 기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따라서 우바새(蒲塞, 優婆塞)들이 공양하는 것이 저자거리를 가득 채우므로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자장(慈藏)의 도구(道具)·포말(布襪, 버선)과 태화지(太和) 용(龍)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가사(由衣) 등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한 헌양현(巘陽縣)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목압침(木鴨枕)의 오리가 일찍이 이곳에서 놀면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한 석(釋) 원승(圓勝)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장(慈藏)보다 먼저 중국으로 유학(西學)하였다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율부(律部)를 널리 펼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찬(讚)하여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으로 향하여 꿈이 깨어 돌아오다(曾向清涼夢破迴).
칠편삼취가 일시에 열렸다(七篇三聚一時開).
승려와 속인의 옷을 부끄럽게 여겨(欲令緇素衣慚愧)
동국의 의관을 중국의 것으로 만들었다(東國衣冠上國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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