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동진(二惠同塵)
석(釋) 혜숙(惠宿)이 호세랑(好世郞)의 무리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好世郞)은 이미 황권(黃卷)에서 이름을 지웠고, 법사(法師) 또한 적선촌(赤善村)에 은거(隠居)하였다.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 은거(隠居)한지 20여 년이 되었을 때 당시 국선(國仙)인 구참공(瞿旵公)이 일찍이 그 부근에 와서 사냥을 하는데 어느 날 혜숙(惠宿)이 길가에 나와 고삐를 잡고 청하여 말하기를, “비천한 승(庸僧) 또한 따르기를 원하는데 가합니까?”라고 하니 공(公)이 허락하였다. 이에 종횡(縦横)으로 달리며 옷을 벗고 서로 앞서니 공(公)이 기뻐하였다. 쉬려고 앉자 누차 고기를 구워 서로 먹고 혜숙(惠宿) 또한 더불어 뜯어먹으며 거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여기에 맛있는 고기가 있으니 더 드리려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공(公)이 좋다고 하였다. 혜숙(惠宿)이 사람들을 가리어 막고 자기의 넓적다리(股)를 잘라 쟁반에 담아서 바치니 옷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공(公)이 놀라서 말하길 “어찌 이러는가”라고 하자, 혜숙(惠宿)이 “처음 제가 공(公)은 인인(仁人)이라 능히 자기를 헤아려 만물에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공(公)이 좋아하는 바를 살펴보니, 오직 살육을 즐겨 그것을 죽여 스스로를 기를 뿐입니다. 어찌 인인(仁人)과 군자의 하는 바이겠습니까. 나의 무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옷을 치켜 올리고 갔다. 공(公)은 크게 부끄러워하고 그 먹은 것을 보니 쟁반 안의 고기가 없어지지 않았다.
공(公)은 심히 이상하게 여겨 돌아가서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真平王)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이게 하였는데 혜숙(惠宿)이 부인의 침상(婦床)에 누워서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사(中使)는 저급하게 생각하여 돌아서서 7~8리(里)를 가는데 혜숙(惠宿)을 길에서 만났다. 그가 어디서 오는지를 물으니 말하기를 “성(城) 안 단월가(檀越家)의 7일재(七日齋)에 갔다가 끝나고 왔다”라고 하였다. 중사(中使)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고 또 사람을 보내 단월가(檀越家)를 조사하니 그 일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숙(惠宿)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硎峴) 동쪽에 장사지내었다. 고개 서쪽에서 오는 그 마을 사람이 있었는데 도중에 혜숙(惠宿)을 만나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오래 이땅에 머물렀으니 다른 곳으로 유람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서로 읍(揖)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떠났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다 설명하고 무덤을 열어 그것을 들여다보니 오직 짚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安康縣)의 북쪽에 혜숙(惠宿)이라는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고 하고, 또한 부도(浮圖)가 있다.
석(釋) 혜공(恵空)은 천진공(天眞公) 집의 고용살이하는 노파의 아들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이다. 공(公)이 일찍이 종기로 거의 죽음에 임박하자 병문안하는 사람이 길을 메웠다. 우조(憂助)는 나이 7살로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손님이 많습니까?” 어머니가 말하기를 “주인이 심한 병이 나서 장차 돌아가시려 한다. 너는 어찌 몰랐느냐?”라고 하였다. 우조(憂助)가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겨 공(公)에게 알렸다. 공(公)이 불러오게 하니 좌상(坐床) 아래에 이르러 말 한 마디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종기가 터졌다. 공(公)은 우연이라 생각하고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성하자 공(公)을 위하여 매(鷹)를 길렀는데 공(公)의 마음에 들었다. 처음 공(公)의 동생이 관직을 얻어 지방에 부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公)에게 매(鷹)를 골라 달라 청하여 치소(治所)로 돌아갔다. 어느 날 밤 공(公)이 문득 그 매(鷹)를 기억하고 다음날 새벽에 우조(憂助)를 보내어 그것을 찾아오게 하려 했다. 우조(憂助)가 이미 먼저 그것을 알고 조금 있다가 매(鷹)를 가져와서 새벽에 바치었다. 공(公)이 크게 놀라며 깨달아 바야흐로 지난 날의 종기를 구한 일이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공(公)이 우조(憂助)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성(至聖)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는지 몰라서 광언(狂言)과 비례(非禮)로 모욕하였으니 잘못을 어찌 씻겠는가. 이후에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해주길 원한다.” 마침내 내려서서 절을 했다.
신이함이 이미 나타나서 마침내 출가하여 중(僧)이 되었고 이름을 혜공(惠空)으로 바꾸었다. 작은 절에 상주하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만취하여 거리에서 삼태기를 지고(負簣) 노래하며 춤을 춰서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렸다. 살고 있는 절은 인하여 부개사(夫蓋寺)라 이름하였는데, 곧 궤(簣)의 향언(鄕言)이다. 매양 절의 우물 안에 들어가 수개월 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인하여 법사(法師)의 이름을 그 우물 이름으로 불렀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의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나왔으므로 절의 중이 이로써 기다리게 되었고, 이미 나오면 옷은 젖어 있지 않았다.
만년에 항사사(恒沙寺)로 옮겨 머물렀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이다. 민간에 이르기를 “항하사(恒河沙) 같은 많은 사람이 출세(出世)하였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한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경소(經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매양 법사(法師)에게 와서 질의하거나 혹은 서로 농담을 하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개울을 따르며 물고기와 새우(魚蝦)를 잡아먹고 돌 위에 변을 보고 있었는데 혜공(恵空)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의 변은 내가 먹은 물고기이다(汝屎吾魚)”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여 오어사(吾魚寺)라 이름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를 원효(元曉)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향속(郷俗)에 그 개울을 모의천(芼矣川)이라고 잘못 부른다.
구참공(瞿旵公)이 일찍이 산에 유람을 갔다가 혜공(恵空)이 산 길에 죽어 쓰러져 있었는데 그 시신이 부어 오르고 문드러져 구더기가 생긴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고삐를 돌려 성에 들어가니 혜공(恵空)이 저잣거리에서 만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 풀을 가지고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靈妙寺)에 들어가 금당(金堂)과 좌우 경루(經樓) 및 남문(南門)의 회랑(廊廡)을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이 줄은 모름지기 3일 후에 풀어라.” 강사(剛司)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따르니 과연 3일에 선덕왕(善德王)이 가마를 타고 절로 들어왔는데 지귀(志鬼)의 가슴에서 불(心火)이 나서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곳만은 면하게 되었다.
또한 신인종(神印宗) 조사(祖師) 명랑(明朗)이 새로이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낙성회(落成㑹)를 열었을 때 덕이 높은 스님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법사(法師)만 이르지 않았다. 명랑(明朗)이 향을 태우고 정성껏 기도를 하자 조금 뒤에 공(公)이 왔다. 이때 마침 큰 비가 왔으나 옷은 젖지 않았고 신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명랑(明朗)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름이 정성스러워서 여기 왔다”라고 하였다.
영적(靈迹)이 자못 많았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하늘에 뜬 채(浮空) 입적하였고 사리(舍利)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이는 내가 예전에 찬술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곧 승조(僧肇)의 후신임을 알 수 있다.
찬(讚)하여 말한다.
초원에서 사냥을 하고 평상에 머리를 누인다(草原縦獵床頭卧).
술집에서 취하여 노래하고 우물 밑에서 잔다(酒肆狂歌井底眠).
짚신 한 짝[혜숙]과 공중에 뜬 것[혜공]은 어느 곳으로 갔는가(隻履浮空何䖏去).
한 쌍의 귀중한 연꽃 속의 불꽃이여(一雙珎重火中蓮).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해(意解) 원효불기(元曉不羈) (0) | 2019.08.08 |
---|---|
의해(意解) 자장정률(慈藏㝎律) (0) | 2019.08.07 |
의해(意解) 귀축제사(歸竺諸師) (0) | 2019.07.31 |
의해(意解) 양지사석(良志使錫) (0) | 2019.07.30 |
의해(意解) 보양이목(寶壤梨木) (0) | 201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