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孝成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선비인 신충(信忠)과 궁의 뜰 잣나무(栢樹) 아래에서 바둑(圍碁)을 두었는데, 일찍이 일러 말하길, “훗날에 만약 경(卿)을 잊는다면, 저 잣나무(栢樹)와 같으리라.” 하였다. 신충(信忠)은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는데, 신충(信忠)을 잊고 그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信忠)은 원망하여 노래를 짓고, 잣나무(栢樹)에 붙이자, 나무는 곧 노랗게 시들었다. 왕이 괴이하여 그것을 살펴보게 하니, 노래를 얻어서 바쳤고, 크게 놀라 말하길, “천하의 정치(萬機)는 매우 일이 많고 번거로워, 충신(角弓)을 잊었구나!”하고는, 이내 그를 불러서 벼슬과 녹봉을 주니, 잣나무(栢樹)는 이에 되살아났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질 좋은 잣나무가(物叱好支栢史),
가을이 채 안 되어 떨어지니(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汝於多攴行齊教因隐),
우러러 보던 그 얼굴이 바뀌게 되었네(仰頓隐面矣攺衣賜乎隐冬矣也).
달이 그림자 진 연못의 물결인냥(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行尸浪阿叱沙矣以攴如攴),
모습이야 바라보나(皃史沙叱望阿乃),
세상 모두 잃은 처지여라(世理都之叱逸烏隐第也).”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 인하여 총애함이 두 왕(两朝)에게서 있었다.
경덕왕(景德王) 왕은 효성왕(曉成王)의 동생이다. 22년 계묘(癸卯)에, 신충(信忠)은 두 벗과 서로 약속하여 벼슬에서 사퇴하고, 남악(南岳)에 들어가, 다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머리를 깍고 스님(沙門)이 되었다.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세워 살면서, 죽을 때까지 은거하길 원하였으며, 대왕(大王)이 복을 받기를 빌어,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진영을 금당(金堂) 뒷벽에 두었으니 이것이다. 남쪽에 속휴(俗休)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 잘못되어 소화리(小花里)라 이른다. ≪삼화상전(三和尙傳)≫을 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가 있어 이것과 서로 혼란스러우나, 계산해보면 신문왕(神文) 여서, 경덕왕(景德) 대와 이미 백여 년 떨어져 있다. 하물며 신문왕(神文王)과 신충(信忠)은 이전 세상의 일로, 즉 이 신충(信忠)이 아님이 명백하다. 마땅히 상세히 살펴야 한다.
또 다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景徳王) 대에 직장(直長) 이준(李俊)이 일찍이 발원하기를,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이순(李純)이라 한다. 나이가 50세(知命)에 이르면 모름지기 출가하여 불사(佛寺)를 창건하리라 하였다. 천보(天寶) 7년 무자(戊子, 748)에 나이 50세가 되니, 다시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큰 절로 하고, 이름을 단속사(斷俗寺)라 하였다. 그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法名)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고, 절에서 20년간 머무르다 죽었다.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양쪽을 살펴 의심을 덜었다.
찬(讚)하여 말한다.
공명을 못 다한 채 귀밑 털이 먼저 하얗게 되니(功名未已鬢先霜),
임금의 은총은 비록 많아도 백년이 급하다(君寵雖多百嵗忙).
건너편 언덕에 산이 있어 번번히 꿈에 보이니(隔岸有山頻入夢),
죽어서도 향을 피워 내 임금의 복을 빌리라(逝将香火祝吾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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