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定宗)

 

정종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定宗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의 휘는 요(堯)이고 자는 천의(天義)이며, 태조(太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이다. 태조 6년(923) 계미(癸未)에 태어났으며, 혜종(惠宗) 2년(945) 9월 무신(戊申) 여러 신하가 왕으로 받들어 즉위하였다.

기유(己酉) 왕규(王規)가 역모(逆謀)를 꾀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원년(946) 봄 정월 왕이 장차 현릉(顯陵)을 배알(拜謁)하려고 재계(齋戒)하고 있던 날 저녁에, 어전(御殿)의 동쪽 산 소나무 사이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 왕요(王堯)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구휼(救恤)하는 것이 임금의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 해 뇌성[天鼓]이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왕이 의장(儀杖)을 갖추고, 불사리(佛舍利)를 받들고 걸어서 10리 떨어진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러 봉안(奉安)하였다. 또 곡식 70,000석을 여러 큰 사원(寺院)에 바치고, 각각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두어 불법(佛法) 배우는 자들을 장려하였다.

2년(947) 봄 서경(西京)에 왕성(王城)을 쌓았다.

3년(948)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1등 말은 은주전자(銀注子) 1개와 금(錦)‧견(絹) 각 1필, 2등은 은 바리때 1개와 금‧견 각 1필, 3등은 금‧견 각 1필로 정하였다. 갑자기 우레가 치며 비가 내렸으며,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번개가 내리치고 또 전각 서쪽 모퉁이도 번개가 내리쳤다. 왕이 크게 놀라자 근신(近臣)들이 부축하여 중광전(重光殿)으로 들었는데, 드디어 편찮게 되자 사면령을 내렸다.

비로소 후한(後漢)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4년(949) 봄 정월 신해(辛亥)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이 죽었다.

3월 병진(丙辰) 왕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동복아우 왕소(王昭)를 불러 왕위를 넘기고 제석원(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4년이며 나이는 27세였다. 왕의 성품이 부처(佛)를 좋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서, 처음에 도참설(圖讖說)을 따라 도읍(都邑)을 서경(西京)으로 옮기기로 결의하고 장정[丁夫]을 징발하여 시중(侍中) 권직(權直)에게 궁궐(宮闕)을 건축하게 하였다. 노역(勞役)이 그치지 않고 또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서 채웠으므로, 많은 백성이 따르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들끓더니 왕이 훙서(薨)하였다는 말이 들리자 역부(役夫)들이 기뻐 날뛰었다. 시호(諡號)를 문명(文明)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였으며, 성의 남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안릉(安陵)이라 불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장경(章敬)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정숙(正肅)을 더했으며, 18년(1027)에 영인(令仁)을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간경(簡敬)을 덧붙였으며, 고종 40년(1253)에 장원(莊元)을 덧붙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기를,
“정종(定宗)께서는 존귀한 임금의 몸으로 10리나 떨어진 사원[浮圖之宮]까지 걸어가서 불사리(佛舍利)를 모셔 두었고, 또 70,000석이나 되는 곡식을 하루 동안 여러 승려(僧)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번 하늘의 꾸지람을 만나자 제 마음을 잃고 병이 났으니, 이른바 ‘군자는 복을 구하되 정당한 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일찍이 듣지 못하였던가? 병이 이미 크게 깊어지자 능히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친아우에게 부탁하여 왕규(王規)와 같은 자로 하여금 그 사이를 넘겨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가상하다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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