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2(太祖二) 21년~26년
21년(938) 봄 3월 서천축(西天竺)의 승려(僧) 홍범대사(弘梵大師) 질리부일라(㗌哩嚩日羅)가 왔는데, 그는 본래 마갈타국(摩竭陁國) 대법륜보리사(大法輪菩提寺)의 승려(沙門)였다. 왕이 양 거리에 위의(威儀)와 법가(法駕)를 성대히 갖추어 그를 맞이하였다.
가을 7월 임자(壬子) 벽진군(碧珍郡) 장군(將軍) 이총언(李悤言)이 죽었다.
이 달에 비로소 후진(後晋)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서경(西京)에 나성(羅城)을 쌓았다.
겨울 12월 탐라국(耽羅國)의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來朝)하자 성주왕자(星主王子)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이 해에 발해인(渤海人) 박승(朴昇)이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22년(939) 봄 3월 무진(戊辰). 좌승(佐丞) 공직(龔直)이 죽었다.
이 해에 후진(後晋)에서 국자박사(國子博士) 사반(謝攀)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로 삼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하였다.
23년(940) 봄 3월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쳤다.
가을 7월 왕사(王師) 충담(忠湛)이 죽자,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에 탑을 세우고 왕이 직접 비문(碑文)을 지었다.
겨울 12월 개태사(開泰寺)가 완공되자, 낙성화엄법회(落成華嚴法會)를 열고 왕이 직접 소문(疏文)을 지었다.
이 해에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여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고 동쪽과 서쪽의 벽에 삼한공신(三韓功臣)을 그렸다. 하루 밤낮동안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는데,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후진(後晋)이 우리나라의 인질[質子] 왕인적(王仁翟)을 돌려보냈다.
24년(941) 여름 4월 을미(乙未)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이 죽었다.
이 해에 후진(後晋)에 대상(大相) 왕신일(王申一)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駝)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契丹)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駝)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26년(943) 여름 4월 왕이 내전(內殿)에 나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순 임금(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농사짓다가 마침내 요(堯)로부터 왕위를 받았고, 고제(高帝)는 패택(沛澤)에서 몸을 일으켜 드디어 한(漢)의 왕업을 일으켰다고 한다. 나도 한미(寒微)한 가문에서 몸을 일으켜 외람되게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았다. 여름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을 태우고 생각을 수고롭게 한 지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감히 왕위에 오른 지 25년이나 되었고 몸은 이미 늙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후사(後嗣)가 정욕을 따라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여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힐까 하는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할 만하다. 이에 「훈요(訓要)」를 지어 후세에 전하노니, 바라건대 밤낮으로 펼쳐보아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으라.
첫째, 우리나라의 대업(國家大業)은 반드시 모든 부처(佛)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파견하여 분향(焚香)하고 수도(修道)하게 함으로써 각각 자신의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僧(의 청탁[請謁]을 받아 각자의 사사(寺社)를 경영하며 서로 싸우며 바꾸고 빼앗는 일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둘째, 여러 사원(寺院)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道詵)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祚業)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國王)이나 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新羅) 말에 다투어 사원[浮屠]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 적자(嫡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이기는 하나 단주(丹朱)가 불초(不肖)하므로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한 것은 참으로 공정한 마음이었다. 만약 맏아들이 불초(不肖)하거든 그 다음 아들에게 주고, 또 불초(不肖)하면 그 형제 가운데 뭇사람들이 추대하는 왕자에게 물려주어 대통(大統)을 잇도록 하라.
넷째, 우리 동방(東方)은 옛날부터 중국의 풍속[唐風]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人性)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삼가 본받지 말라.
다섯째, 내가 삼한(三韓)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고 대업(大業)을 만대(萬代)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四仲月]에 왕은 그 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안녕(安寧)에 이르도록 하라.
여섯째, 내(朕)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 있으니, 연등회(燃燈會)는 부처(佛)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의 신령(天靈)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姦臣)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 나도 처음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를 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國忌]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대로 시행하라.
일곱째, 임금이 신민(臣民)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우니,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중요한 것은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소(讒訴)를 멀리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스러워질 것이고, 참소(讒訴)는 꿀과 같으나 믿지 않으면 곧 참소(讒訴)는 스스로 그친다. 또 백성들이 때를 따라 일을 하고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아주면, 저절로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좋은 미끼를 드리우면 반드시 걸려드는 고기가 있고, 상을 많이 내려주면 반드시 좋은 장수가 있게 된다. 또 활을 당기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어진 정치를 베풀면 반드시 좋은 백성이 모여든다.’고 하였으니 상벌(賞罰)이 공정하면 음양(陰陽)도 순조로워질 것이다.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公州)의 금강(錦江)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州郡)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王侯)나 외척(外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일찍이 관청[官寺]에 예속된 노비(奴婢)와 진(津)‧역(驛)의 잡척(雜尺)이 권세가에게 투탁(投託)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姦巧)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아홉째, 모든 관료(官僚)의 녹봉(祿俸)은 나라의 규모를 보아 정한 제도이기 때문에 늘리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古典)에 이르기를, ‘공적에 따라 녹봉을 정하며 관직을 사사로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아무 공적이 없는 자나 사적(私的)으로 친근한 사람들에게 헛되이 천록(天祿)을 받게 한다면,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 사람도 복록(福祿)을 길이 누릴 수 없을 것이니 결단코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 또한 강하고 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병졸은 마땅히 지켜주고 보살펴주며 요역을 헤아려 면제해주고 매년 가을에 무용(武勇)이 남들보다 뛰어난 자를 사열(査閱)하여 편의(便宜)에 따라 벼슬을 더하여라.
열째, 나라를 가진 자나 집을 가진 자는 근심이 없더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周公)은 큰 성인이지만 「무일(無逸)」 1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로 삼았으니, 마땅히 이를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고 드나들 때마다 보고 반성하여라.”
라고 하였다. 십훈(十訓)의 끝은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는 네 글자로 맺었는데, 후대의 왕은 이를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5월 왕이 편찮아서 정무 처리를 중단하였다.
정유(丁酉) 재신(宰臣) 염상(廉相)·왕규(王規)·박수문(朴守文) 등이 곁에 모시고 앉아 있는데 왕이 말하기를, “한(漢) 문제(文帝)의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천하의 온갖 사물이 태어나 죽지 않는 것이 있지 않으니, 죽음이란 천지(天地)의 이치이며 사물의 자연이므로 어찌 크게 슬퍼하랴?’고 하였으니, 예전의 현명한 왕은 마음을 다잡음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든 지 이미 20일이 지났지만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보니 어찌 근심함이 있겠는가? 한(漢) 문제(文帝)의 말이 곧 내 뜻이다. 안팎의 중요한 일 중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한 것은 그대들이 태자 왕무(王武)와 함께 결재한 뒤에 알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병오(丙午) 병이 더욱 심해지자 왕은 신덕전(神德殿)에 거둥하여 학사(學士) 김악(金岳)에게 명하여 유조(遺詔)를 기초(起草)하게 하였다. 글이 이루어졌으나 왕이 다시 말하지 않기에 좌우에서 목 놓아 크게 곡하자 왕이 묻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백성의 부모로 계시다가 오늘 여러 신하를 버리고자 하시니 저희는 애통함을 스스로 참을 수 없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뜬구름 같은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하다.”라고 하고, 말을 마친 후 잠시 뒤에 훙서(薨)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26년이며 나이는 67세였다.
유명(遺命)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가 모두 태자의 처분을 듣도록 하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漢) 문제(文帝)와 위(魏) 문제(文帝)의 고사(故事)에 기대어 모두 검약(儉約)을 좇으라고 하였다. 왕은 기개가 크고 넓었으며 조정(朝廷)을 바로잡고 상벌을 밝게 행하였다.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등용하며 유도(儒道)를 중하게 여겼다. 시호(諡號)를 신성(神聖)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였으며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諡號)에 원명(元明)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광열(光烈)을 덧붙이고, 18년(1027)에는 대정(大定)을 덧붙이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장효(章孝)를 덧붙이고, 인종(仁宗) 18년(1140)에 인용(仁勇)을 덧붙이고, 고종(高宗) 40년(1253)에 용열(勇烈)을 덧붙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賛)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태조(太祖)의 기개와 덕량(德量)은 중국(中國)에서 태어났더라도 마땅히 송(宋) 태조(太祖)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宋) 태조(太祖)는 주(周)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세종(世宗)은 어진 군주로 송(宋) 태조(太祖)를 대우함이 매우 두터웠고 송(宋) 태조(太祖)도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공제(恭帝)가 나이가 어려 정사(政事)가 태후(太后)에게서 나오자 여러 사람의 정(情)에 떠밀려 왕위를 선양(禪讓) 받았으니 대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궁예(弓裔)를 섬겼는데, 시기가 많고 포악한 임금이 삼한(三韓) 땅에서 그 둘을 가지게 된 것은 태조(太祖)의 공이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공을 세우고도 반드시 의심을 받는 자리에 있었으니 위태롭다 이를 만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고 장병(將兵)들이 추대하였으나, 오히려 굳게 사양하고 연릉(延陵)의 절개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백성을 위로하고 임금의 죄를 벌하는 일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으리오? 살림을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하면서도 상과 벌을 엄정히 시행하였으며[信賞必罰], 공신(功臣)을 받들기를 정성껏 하였지만 권력을 빌려 주지는 않았다. 나라를 세워 후대에 왕통(王統)을 드리웠으니 진실로 마땅히 한결같은 법도이다. 송(宋) 태조(太祖)는 강남(江南)의 이씨(李氏)를 남의 와탑(臥榻)에서 코골고 낮잠 자는 자에 견주었으니 석경당(石敬塘)의 후진(後晋)이 거란(契丹)에게 뇌물로 준 산후(山後)의 16주(州)도 대개 주머니 속의 물건으로 보았던 것이고, 이미 북한(北漢)을 얻은 후 장차 멀리 말을 몰아 진한(秦漢)의 강역(疆域)을 평정하고자 할 뿐이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즉위한 뒤, 김부(金傅)가 아직 찾아오지 않고 견훤(甄萱)이 사로잡히지 않았는데도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직접 북쪽 변방을 순시하셨다. 그 뜻도 또한 동명왕(東明王)의 옛 땅을 우리 집안의 보배[靑氈]로 생각하고 반드시 석권(席卷)하여 가지려 한 것이니, 어찌 닭을 잡고 오리를 묶는 데 그칠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본다면, 비록 크고 작은 형세는 같지 않더라도 두 태조(太祖)의 기개와 덕량은 이른바 처지를 바꾸더라도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충선왕(忠宣王)은 총명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왕구(王構)·염복(閻復)·요수(姚燧)·소석(蕭奭)·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과 같이 박학(博學)하고 점잖은 중원(中原)의 선비들이 모두 그 문하(門下)에서 노닐었으니 아마 일찍이 이들과 더불어 논하여 보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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