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官昌)

 

관창(官昌) 또는 관장(官狀)은 신라(新羅) 장군(將軍)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거동과 외양(儀表)이 모두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 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능숙하였다. 대감(大監)인 어떤 사람이 태종대왕(太宗大王)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唐)나라 현경(顯慶) 5년 경신(庚申, 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唐)나라 장군(將軍)과 더불어 백제(百濟)를 칠 때, 관창(官昌)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다. 아버지 품일(品日)이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功名)을 세워 부귀(富貴)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官昌)

“예.”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 들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살아서 백제(百濟)의 원수(元帥) 계백(階伯)의 앞에 끌려갔다. 계백(階伯)이 투구를 벗게 하니, 그가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신라(新羅)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少年)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겠는가!”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官昌)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웠다. 계백(階伯)이 사로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品日)이 그 머리를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전군이 이를 보고 슬퍼하고 한탄하며 뜻을 세웠다. 북을 요란하게 치며 진격하니, 백제(百濟)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大王)이 급찬(級湌)의 위계를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주었으며, 그 집에는 당(唐)나라 비단 3십 필, 20승포 3십 필과 곡식 1백 섬을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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