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裂起) 구근(仇近)
열기(裂起)는 기록에 일족의 성씨가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당(唐)나라 황제가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다.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이 국왕(國王)에게 소식을 전하며, 평양(平壤)에 군량을 보내도록 하였다.
왕이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에게 명령하여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 2백 5십 섬을 운반해 주도록 하였다.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눈바람이 불어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이 군사들이 피곤한 것을 알고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치려고 하였다. 당(唐)나라 군영과는 3만여 보(步) 떨어져 있었지만 앞으로 갈 수 없었고 편지를 보내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열기(裂起)는 보기감(步騎監)으로 따라갔는데,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비록 우둔하고 느리지만, 가는 사람의 수를 채우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軍師) 구근(仇近) 등 15인과 함께 활과 큰 칼을 가지고 말을 달렸다.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만 보고 막지는 못하였다. 대략 이틀을 달려 소(蘇)장군에게 명령을 전달하니, 당(唐)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기뻐하며 위로하였다. 답서를 보내기에 열기(裂起)가 또 이틀을 걸려 되돌아왔다. 유신(庾信)이 그 용기를 아름답게 여겨, 급찬(級湌) 관등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庾信)이 왕에게 고하기를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은 천하의 용사(勇士)입니다. 신(臣)이 형편을 살펴서 급찬(級湌)의 위계를 주었으나, 공로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사찬(沙湌)의 위계를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사찬(沙湌)의 지위는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유신(庾信)이 두 번 절을 하고,
“벼슬은 공유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이니,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후에 유신(庾信)의 아들 삼광(三光)이 나라의 정무를 맡았을 때, 열기(裂起)가 가서 군(郡) 태수(太守)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裂起)가 기원사(祇園寺)의 승려인 순경(順憬)에게,
“나의 공이 큰데 군수(郡守)를 청하여 허락받지 못하였다. 삼광(三光)이 아마도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여 나를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순경(順憬)은 삼광(三光)을 설득시켰고, 삼광(三光)은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太守)직을 주었다.
구근(仇近)은 원정공(元貞公)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았다. 원정공(元貞公)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고 하면서, 그를 곤장으로 때렸다. 구근(仇近)이
“나는 일찍이 열기(裂起)와 더불어 미루어 알기 어려운 땅에 들어가 대각간(大角干)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대각간(大角干)은 나를 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였다. 지금 뜬소문으로 나를 벌하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하였다.
원정(元貞)이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7권(卷第四十七) 열전(列傳) 죽죽(竹竹) (0) | 2020.06.11 |
---|---|
제47권(卷第四十七) 열전(列傳) 비령자(丕寧子) 거진(擧眞) 합절(合節) (0) | 2020.06.10 |
제47권(卷第四十七) 열전(列傳) 김흠운(金歆運) (0) | 2020.06.08 |
제47권(卷第四十七) 열전(列傳) 관창(官昌) (0) | 2020.06.07 |
제47권(卷第四十七) 열전(列傳) 김영윤(金令胤) 흠춘(欽春) 반굴(盤屈) (0) | 2020.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