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의 자(字)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하였다. 서울(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져 그 세계(系)를 알 수 없다.

최치원(崔致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자 장차 배를 타고 (唐) 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십 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十年不第 即非吾子也). 가서 부지런히 힘쓰라(行矣勉之).”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唐)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공부하였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甲午, 경문왕 14년 874)에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裴瓚) 아래에서 한 번에 과거에 합격(及第)하였다.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하였고,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삼았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그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을 추천하여 종사관(從事)을 삼고,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表)·장(狀)·서(書)·계(啓)가 지금까지 전한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졌다. 희종(僖宗)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헌강왕 11년, 885)에 조서(詔書)를 갖고 사신으로 가도록 하였다. 남아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가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스스로 서쪽에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았다고 생각하여서 돌아와서는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말세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으니 나가 태산군(太山郡)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왕 7년, 893년)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太守)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최치원(崔致遠)부성군(富城郡)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때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매해 기근이 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많이 일어나니 길이 막혀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최치원(崔致遠)은 또한 일찍이 사신의 명령을 받들어 당(唐)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단 그때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侍中)에게 올린 편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伏聞東海之外有三國)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其名馬韓·卞韓·辰韓). 마한은 고구려(馬韓則髙麗), 변한은 백제(卞韓則百濟), 진한은 신라입니다(辰韓則新羅也).

고구려(髙麗)와 백제(百濟)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吳)·(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幽)의 (燕), (齊), (魯)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中國)의 커다란 해충(巨蠹)이 되었습니다. (隋)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唐)나라 태종황제(太宗皇帝)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삼가 천벌을 집행하였습니다. 고구려(髙麗)가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저희 무열대왕(武烈大王)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쪽 지방의 걱정을 다스리는 것을 돕기를 청하였으니 (唐)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髙麗)와 백제(百濟)가 이전처럼 나쁜 짓을 하자 무열왕(武烈)은 입조하여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高宗) 황제 현경(顯慶) 5년(태종무열왕 7년, 660)에 이르러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10도(道)의 강한 군사와 다락을 얹은 배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대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그 땅에 부여도호부(扶餘都督府)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 관리에게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풍속이 서로 달라 여러 차례 반란의 소식이 들리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 지방으로 옮겼습니다.

총장(摠章) 원년(문무왕 8년, 668) 영공(英公) 서적(徐勣)에게 명하여 고구려(髙句麗)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安東都府)를 두었습니다.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농우(隴右)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구려(髙句麗)의 유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기대어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개원(開元) 20년(발해 무왕 14, 732)에 천자의 조정을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왕 김모(金某)에게 더하여 정태위(正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습니다. 겨울이 깊고 눈이 많이 내려 제후와 중국의 군대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한 쪽 지방이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하니 이는 곧 저희 무열대왕(武烈大王)의 공로입니다.
지금 저는 유생(儒生)들 중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인재로서 외람되이 표(表)와 장(章)을 받들고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진실로 간절함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합니다. 엎드려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에 본국(夲國)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바람에 떠밀려 명주(明州)에 이르러 해안에 내렸을 때 절동(浙東)의 어느 관리가 발송하여 서울에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중화(中和) 2년(헌강왕 8년, 882)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은 반란이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서 마침내 초주(楚州)에서 해안에 내려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이르러 황제의 수레가 (蜀) 지방에 행차하신 것을 알았는데, 고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보내 감독하여 호송하여 서천(西川)에 도착하도록 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太師) 시중(侍中)께서는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증을 내려 주십시오. 지방 관청으로 하여금 선박과 식사 및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나귀와 말과 사료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장수를 파견하여 호송을 감독하여 황제의 수레 앞에 이르도록 하여 주십시오.” 여기에서 말한 바 태사(太師) 시중(侍中)의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은 서쪽에서 (唐)을 섬기다가 동쪽으로 고국(故囯)에 돌아온 후까지 모두 혼란한 세상을 만나 운수가 꽉 막히고(蹇屯), 움직이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산림의 기슭과 강이나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스스로 구속되지 않았다. 누각을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 삼고, 풍월을 읊었다. 경주(慶州)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涼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별장(别墅) 같은 곳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最後)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었다. 벼슬하지 않고 편안히 살다가 노년을 마쳤다.

처음 서쪽으로 유학하였을 때 강동(江東)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나은(羅隱)은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게 여겨 쉽게 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최치원(崔致遠)에게는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함께 합격한 고운(顧雲)과 친하게 지냈다. 귀국하려 하자 고운(顧雲)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내 들으니 바다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는데(我聞海上三金鼇)

금자라 머리에 이고 있는 산 높고 높구나(金鼇頭戴山髙髙).

산 위에는 구슬과 보배와 황금으로 장식된 궁전(山之上兮珠宫具闕黄金殿)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의 큰 파도가 치네(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곁에 한 점 계림이 푸른데(傍邉一點雞林碧)

자라의 산 빼어난 기운을 품어 기특한 이 낳았네(鼇山孕秀生竒特).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十二乗舩渡海來)
문장은 중화국을 감동시켰네(文章感動中華國).
열여덟 살에 전사원에서 거리낌없어(十八横行戰詞苑)

한 화살 쏘아 금문책을 깨었네(一箭射破金門䇿).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 쓰기를 “최치원(崔致遠)《사륙집(四六集)》한 권,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라고 하였고, 주(註)에 쓰기를 “최치원(崔致逺)은 고구려 사람(髙麗人)으로 빈공과(賔貢)에 급제(及第)하여 고변(髙駢)의 종사관(從事)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름이 중국(上囯)에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또 문집(文集) 30권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고 있다.
예전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때 최치원(崔致遠)은 비상한 인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여실 것을 알고 그로 인해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계림은 누런 잎이고(雞林黄葉) 곡령은 푸른 소나무(鵠嶺青松)”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임금을 찾아뵙고,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이른 자가 하나가 아니었다. 현종(顯宗)께서 왕위에 계실 때 최치원(崔致遠)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였다.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壬戌, 1022) 5월에는 시호를 추증하여 문창후(文昌侯)라고 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