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336호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황전리 12) 화엄사
「구례 화엄사(華嚴寺)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은 화엄사(華嚴寺)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화엄사상의 삼신불(三身佛)인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표현한 것인데, 도상면에서 영원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수행에 의해 부처가 된 보신불(報身佛),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화신불(化身佛, 응신)을 나타내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1635년(인조 13) 조선 후기 유명 조각승인 청헌(淸軒,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 영이(英頤)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협업해 완성한 17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이다. ‘삼신불(三身佛)’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보신(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화신(化身) 석가불(釋迦佛)을 말하며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나 사경(寫經),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작품으로는 유일해 조선 후기 불교사상사와 조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최근에는 복장유물과 관련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화엄사(華嚴寺)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의 제작시기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즉 이 삼신불(三身佛)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華嚴寺)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1634∼1635년 동안 조성한 것이다.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부부, 다수의 왕실 상궁 등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은 임진왜란 이후 완주 송광사, 법주사, 화엄사, 쌍계사 등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사찰의 중창 불사를 주도해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삼신불(三身佛)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연화대좌와 팔각의 목조대좌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대좌를 포함해 총 3m가 넘는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표현된 기법 등 조각솜씨가 중후한 느낌을 더해 준다. 이 삼신불상은 청헌파(淸憲派)와 응원(應元)ㆍ인균파(印均派)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流派)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淸憲派)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면,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應元)과 인균(印均)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엄사(華嚴寺)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淸憲), 응원(應元), 인균(印均)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으로서, 이는 불사를 주관한 벽암(碧巖) 각성(覺性), 의창군(義昌君)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표현된 삼신불(비로자나-노사나-석가)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적ㆍ조형적 수준도 당대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복장유물과 관련 기록 후령통 2건, 시주질 2건 함께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