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에 그려진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보331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昌德宮) 이문원(摛文院) 측우대(測雨臺)’는 1782년(정조 6)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測雨臺)’는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에도 이어졌음 알려주는 유물이다. 비록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명문과 <동궐도(東闕圖, 지금의 청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그린 궁궐그림으로, 19세기 전반에 제작)> 등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昌德宮) 이문원(摛文院, 각종 왕실 문헌을 보관한 전각으로, 규장각의 부속 시설이었음)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되며, 정면에 조선 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이 측우대의 명문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하였으며 높이 1자 5치, 지름 7치라는 사실, 둘째, 1770년(영조 46년)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八道), 강화부, 개성부에 두었다는 사실, 셋째, 1782년(정조 6년) 여름에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창덕궁(昌德宮) 이문원(摛文院) 측우대(測雨臺)’는 조선 전기에 확립된 강수량 측정제도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조선 후기까지 그 전통이 지속되었음을 증명해주는 사례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농사를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던 당시, 기상(氣像)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가뭄과 홍수 대비를 위한 측우기를 고안하고,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雨量)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는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