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죽(竹竹)
죽죽(竹竹)은 대야주(大耶州)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學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선덕왕(善德王)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大耶城) 도독(都督)의 당하(幢下)에서 보좌하였다.
왕 11년 임인(壬寅, 642) 가을 8월에 백제(百濟) 장군(將軍)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독(都督) 품석(品釋)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서 그녀를 빼앗았다. 검일(黔日)은 그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남몰래 도와 그 창고를 불태웠다. 때문에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두려움으로 굳게 지키지 못하였다.
품석(品釋)의 보좌관 아찬(阿湌) 서천(西川) 또는 사찬(沙湌) 지삼나(祗彡那)가 성에 올라가 윤충(允忠)에게 이르기를,
“만약 장군(將軍)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윤충(允忠)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고 하였다. 서천(西川)이 품석(品釋) 및 여러 장수(諸將士)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고 하였다.
죽죽(竹竹)이 그들을 말리며,
“백제(百濟)는 자주 번복을 잘 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允忠)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는 것은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품석(品釋)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百濟)의 숨어있던 군사가 나타나 그들을 다 죽였다. 품석(品釋)이 나가려고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竹竹)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였다.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죽죽(竹竹)에게 이르기를,
“지금 군사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은 합당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으며 꺾일지라도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힘써 싸웠고 성이 함락되자 용석(龍石)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죽죽(竹竹)에게는 급찬(級湌), 용석(龍石)에게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처자(妻子)에게는 상을 주고 서울(王都)로 옮겨 와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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